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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5

  1. 2018.05.13 스데반
  2. 2018.04.29 맛디아
  3. 2018.04.21 데오빌로
  4. 2018.04.11 베드로(시몬)
  5. 2018.04.07 (사도)요한
2018. 5. 13. 21:37

스데반 성경인물이야기2018. 5. 13. 21:37

뜻:면류관
예루살렘 교회에서 뽑은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빈민 구제 사업을 위해 활용하여 때로는 설교도 했다(행6장).
그는 헬라 말을 잘하는 헤레니스트로서 신앙이 돈독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며
말을 잘하고 이적 행하는 은사도 받았으며 일곱 집사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구약의 역사에 근거하여 유대교의 성전 예배를 비판하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모독 하였다는
위증자들의 모함으로 예루살렘 근처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돌에 맞아 죽는 당시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연상케 하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행7장).
스데반의 최후를 목격한 바울은 얼마 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회개 하였 는데
아마도 스데반의 죽음에서 크게 작용되었을 것이다(행7:59-8:1).

(원문보기)

스데반- 초대교회의 큰 인물(유흥준 목사) (행 6:8-15)
교회의 가장 큰 재산이 무엇일까요?
잘 건축 된 건물? 풍부한 재정? 짜임새 있는 조직? 다양한 프로그램? …. 이런 모든 것들이 교회의 중요한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훨씬 더 값어치있는 재산이 있으니 곧 사람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많이 있을 때 큰 재산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훈련 된 일꾼, 재목과 같은 사람, 인물다운 인물〉을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는 감사하고요, 우리 광성교회에는 소망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을 살필 때 큰 재목의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가능성이 보입니까? 아니면 그저 평범할 뿐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의 눈에는 한사람 한사람이 큰 가능성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우리 광성교회의 커다란 재산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가능성이 있는 현재 위치에서 계속해서 자라나고,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자라서 큰 재목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곳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이 인물다운 인물로 성장해 그 힘이 모아진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초대교회, 즉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된 뒤 놀라운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그러자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구제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자 구제를 받지 못한 측에서 불만을 터트린 것입니다. 그때 그 문제를 해결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선출 된 7명의 일꾼들이었습니다. 7명의 일꾼들이 세워진 뒤 예루살렘교회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도 주님의 제자가 되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12사도들만의 노력 때문이 아닙니다. 12사도들만 있었을 땐 힘이 벅찼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7명의 일꾼들이 세워지자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세워지며 상상을 초월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목사의 힘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목회자가 많든 적든, 어느 교회를 불문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든든해지고 부흥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평신도 지도자로 세워져야 합니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6:3절에서 3가지 조건을 살폈는데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자기 안에 그리스께서 내주 함을 알고, 성령의 열매로 채워져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은 자를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충만한 사람은 악한 사단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있는 사람이요 능력의 사람입니다. 전쟁에서 같이 맞서 싸울 때 누가 승리합니까? 힘이 세야 이깁니다.

2) 지혜 충만한 사람입니다.
전쟁에서 힘만 가지고 싸웁니까? 아닙니다. 작전을 잘 세워야 합니다. 지혜롭게 대처해야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분별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으며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지금 교회 안에 생겨난 파당들을 다루는데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현명치 못한 사람의 부적절한 조정은 마치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으로 더 많은 불화와 긴장을 야기시킵니다. 지혜가 충만하면 혹 상대방보다 힘이 약하다 할지라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가 미디안과 전쟁을 할 때 미디안 군대의 숫자는 수많은 메뚜기 떼 같았고 그들이 타고 왔던 약대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미디안 군대는 대 참패를 당했습니다. 기드온 용사는 단지 300명일뿐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승리했습니까? 지혜가 가져다 준 승리였습니다.

300명을 3팀으로 나눈 뒤 각각 항아리와 나팔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아리 속엔 횃불을 숨겼습니다. 한 밤중에 300명이 동시에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들었을 때 미디안 군대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다 대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혜의 승리였습니다. 지혜는 전쟁에서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어느 큰 회사의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비서실의 특성상 그녀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본의 아닌 거짓말을 자주 해야만 했습니다. 사장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한다든가... 등등의 거짓말로 인해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이 늘 괴로웠습니다.

그로 인해 고민하던 중 어느 날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제가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사장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고 다른 부서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사장님께 늘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또 현재의 직책에 대한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고통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거짓말을 해야하는 관계로 신앙인으로써 제 양심이 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대우가 좋지 않아도 괜찮으니 다른 부서로 보내 주실 수 없습니까? 얼마나 지혜로운 모습입니까?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더 좋은 부서로 자리 이동이 되었습니다. 지혜의 승리였습니다.

사도행전 프로젝트도 지혜 충만의 결과입니다. 전국의 교회가 같은 본문을 가지고 동시에 설교한다면 컴컴한 밤에 횃불 하나만 드는 게 아니고 50000 개를 동시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동시에 50000개의 나팔을 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그 역사가 엄청나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 프로젝트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사단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것입니다.

3)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좋게 입증이 되고, 좋은 소문이 들리며, 선한 증거를 지니고, 좋은 평판을 받은 자입니다. 나무랄 데 없어야 합니다. 성실하고 충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도덕적이고 올바르며 모든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칭찬 듣는 사람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칭찬 받으면 왕실은 든든해집니다. 반대로 민심이반은 왕권이 무너지는 핵심입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쪽이 정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군사정권시절에 천주교가 급속도로 성장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불의와 맞서며 바른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국민들 사이엔 천주교에 대한 칭찬과 기대감이 대단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몰려들었습니다.
② 반면에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은 침묵 내지는 그들에게 동조했습니다. 칭찬 듣지 못한 교회가 된 셈입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이동하였습니다. 칭찬 듣지 못해서 빼앗기고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다시 칭찬 듣는 교회가 되어서 회복시켜야 되겠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먼저 좋은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충만, 지혜 충만, 칭찬 듣는 사람, 이 3가지를 잘 갖추시기 바랍니다.

자격을 갖춘 7일꾼이 세워지자 예루살렘교회는 급속도로 좋아졌습니다. 좋은 일꾼이 좋은 교회를 만듦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중 오늘 본문은 그들 가운데 한사람인 스데반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일반 성도였지만 아주 신실하게 믿는 자였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왕관이라는 의미입니다.
스데반은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지혜가 충만했습니다.
평판이 좋은 증거의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일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위대한 변호자였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집사였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였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첫째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행한 사람입니다.
8절 보세요.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①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 은사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고 은혜스러운 성격과 태도로 일했습니다.
② 스데반은 권능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습니다.
③ 그는 큰 기사와 이적을 민간에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사람이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기기 전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집사였고 일반성도였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던 기적이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질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쫓겨나고 등등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시간 저는 여러분에게 8절에 있는 〈큰〉이라는 한 글자를 살피면서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큰 믿음, 큰 능력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큰 기사라고 표현한 걸 보면 작은 기사도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믿습니까? 어느 정도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로 배아픈 것, 머리 아픈 것 치료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앉은뱅이는 어떻습니까? 배아픈 것은 가능하지만 앉은뱅이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믿음입니까? 작은 기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을 발전시켜 나갈 때 큰 기적도 가능합니다. 하나님께는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힘든 일, 쉬운 일 구별이 없습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가 죽음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하실 때 힘들 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 살리실 때 땀을 뻘뻘 흘리고 고민 고민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하시던가요? 아닙니다. 그냥 한마디만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자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이왕 나타낼 바엔 크게 나타냅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지 마십시오. 믿음을 큰 믿음으로 키우십시오.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 있어도 산을 명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 씨앗입니까? 깨알보다 더 작습니다. 그 작은 믿음이 이처럼 엄청난 역사를 이룬다면 큰 믿음을 가졌을 때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이루겠습니까?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께 칭찬 받기를 바랍니다. 〈나는 믿음이 약해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 마십시오. 겸손한 말 같지만 그런 자세로는 큰 믿음 힘들고 큰 기적 힘듭니다. 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 못하지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능치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해 주신다고 믿는데 하나님이 못하실 게 뭐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어 하시고자 하는 대로 마음껏 일하심을 믿으십시오. 믿을 때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지 못하는 자, 사실을 인정해 주지 않는 자를 통해서는 큰 기적은커녕 작은 기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2) 축복을 받음에 있어서도 이왕이면 큰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축복을 사모하고 또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일 힘있게 하길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큰 물질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일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선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필요한 물질을 어떻게 주십니까?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앞으로 우리 광성교회가 여러 가지 일들을 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그 일을 진행하실 터인데 여러분들이 그 축복의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물질로 봉사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는가를 살피신 뒤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반대로 하나님 일 하겠다고 핑계는 대지만 그 중심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축복을 구한다면 하나님은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교회의 어떤 어려운 모습이 보입니까? 그 일을 내가 꼭 감당하고 싶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안타까워 죽을 지경의 마음이 있다면 큰 축복을 요청하십시오.

정말 물질로 마음껏 봉사하고픈 진심 어린 자세, 진실된 자세가 있다면 큰 축복을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즐겁고, 또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 있다면 큰 축복을 사모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해 주심을 믿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록펠러와 같이 멋있는 축복자, 큰 축복자가 많이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축복을 하나님을 위해서 힘있고 크게 사용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광성교회 안에서도 록펠러 같은 사람이 많이많이 나타나길 축복합니다.

3) 큰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큰 꿈을 가질 때, 육체의 정욕적인 큰 꿈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꿈입니까? 큰 상급의 꿈, 큰 일꾼의 꿈....등등등 입니다.
① 천국에서 큰 상급 받겠다는 꿈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천국 상급을 바라보면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주님 때문에 고난받고 핍박받는 게 천국에서 영광이요 상급이기에 그는 죽어가면서도 기뻐했고 감옥에서도, 채찍 맞아가면서도, 굶주리면서도 그 길을 기꺼이 갔습니다.

② 큰 일꾼이 되겠다는 큰 꿈도 가지십시오. 〈나 같은 게 무슨 큰 일꾼이고 큰 꿈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실망하십니다.
나의 값어치는 천하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평가한 게 아니라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평가입니다. 그러니 나는 천하보다 더 귀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평가가 틀릴 수 있겠습니까? 보석감정사가 보석을 감정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것은 진짜고 저것은 가짜다 고 판결을 내립니다. 전문가에 의해서 판결이 내려지면 그것은 공인된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값어치를 너무너무 귀하게 여기십니다. 온 천하만물 다 갖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귀히 여겨주심에도 불구하고 돈 좀 없다고, 지식 좀 부족하다고, 환경이 보잘것없다고, 꿈을 가질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꿈을 가져야합니다. 작은 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큰 꿈을 가질만한 분명한 가치가 있습니다.

③ 교회를 향해서도 큰 꿈과 큰 자부심을 가져야합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 앞에 마음껏 쓰임 받아 보겠다는 꿈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 사랑 받고, 하나님이 무슨 일이든 쉽게 맡길 수 있고, 그러면서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맡겨주시는 교회, 하나님께서 계산하실 때 가장 칭찬 많이 받는 교회, 가장 많은 상급 받는 교회, 이런 꿈을 모든 성도가 다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가질 때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 적인 안목 앞에서는 큰 교회가 되기 힘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방식의 계산 앞에서는 어느 교회든지 가장 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10명 모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수만 명 모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큰 교회 될 수 있습니다.


4) 아울러 여러분의 교회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져야합니다.
〈우리 교회가 별 볼일 있을라구?〉 이렇게 생각한다면 엄청난 잘못이요 크나큰 실수입니다. 여러분의 값어치가 엄청남을 믿습니까? 그런데 교회는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이 수없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값어치가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또 교회는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곳입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 광성교회의 기초입니다. 사도들의 피가 우리 광성교회를 세웠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야고보의 순교→베드로의 순교→바울의 순교를 거치면서 그 뿌리에 근거해 우리 광성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피 흘림이 우리 교회를 든든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지금 우리 교회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시시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광성교회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것은 주님과 사도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왜 부끄럽게 여깁니까? 몇 만 명 모이는 교회에 비해 부족함이 많고 초라함이 많기 때문입니까? 몇 만 명 모이면 어떻고 몇 명 모이면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면 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요, 다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교회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우리 광성교회가 우리나라 5만 교회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교회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 광성교회 하나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고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몽땅 쏟아 부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 광성교회는 가장 큰사랑을 받는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우리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주님이 얼마나 서글퍼 하시겠습니까? 또한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무시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있나요? 이제까지 교회 운영 누가 하셨나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 교회를 누가 책임져 주셨나요? 여러분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우리 광성교회를 세우셨고 우리 광성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고 계십니다. 사단의 세력을 주님이 다 막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이처럼 주님의 사랑 받는 교회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우리 광성교회는 주님 보시기에 가장 큰 교회입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자부심 가질만하지 않습니까? 교회부흥에 대해서도 큰 부흥을 꿈꾸고 이루시기 바랍니다. 큰 부흥을 이루라는 것은 다른 교회 교인 뺏어서 채우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자세로 목회 하는 교회라면 세상 적인 교회는 될지언정 하나님의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큰 부흥을 이루라는 말은 전도 열심히 하여 죽어 가는 영혼을 수없이 살리라는 말입니다. 전도 열심히 하여 믿는 자가 많아지면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십니다. 전도 열심히 해서 수만 명 모이는 교회가 여러 곳 생긴다면 정말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도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전도에 불붙으면 하나님께서 큰 부흥을 주십니다. 우리 광성교회가 영혼 구원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여 큰 부흥을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 둘째 스데반은 격렬하고도 무고하게 반대를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1) 스데반은 믿음에 대하여 변론한 사람입니다.
9-10절을 보세요. 〈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 전역에 걸쳐 있는 여러 개의 회당에서 설교했습니다(9). 이때에 특별히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이는 다섯 개의 회당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반대하여 일어났습니다(10). 그 이유는 그들과 그들의 선조들은 강제로 고국 유대에서 추방을 당하여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유대 종교에 충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그들과 그들의 종교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스데반의 설교 중에, ①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위하여 바쳐진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희생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②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그분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제사장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 떼를 위한 사역자요 하나님의 종이지 중보자가 아닙니다 라고 믿음을 변호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는 중에 예수를 최고의 희생자요 최고의 중재자로 선포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껏 배워왔고 지켜왔던 모든 것에 반대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율법의 완성자요 인간의 해방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파괴자로 보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일어나 스데반의 설교에 논쟁을 벌였으며 스데반은 믿음을 변호함에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하여 말할 때에 능히 당치를 못했습니다. 스데반은 격렬하고도 무고하게 반대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2) 스데반의 죄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11-14절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 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스데반이 큰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자 이스라엘 밖에서 살았던 여러 지역의 헬라파 유대인들과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그들이 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세웁니다. 그래서 거짓증인을 세워서 세 가지 죄목으로 증언을 하게 합니다.

첫째는 스데반이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다고 증언합니다. 둘째는 율법을 거스리는 율법을 모독했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합니다. 셋째는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하여준 유대 규례들의 파괴를 설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거스리면 어떤 형벌을 받았습니까? 죽음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기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스데반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그는 성령 충만했을 뿐이고 지혜 충만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무엇입니까?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꾼이 되면 이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절을 보세요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의 모습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떨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고 천사처럼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성령 충만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믿음을 지키십시오. 세상의 악인들은 우리의 육은 죽일 수 있으나 영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일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사도들이 그리고 스데반이 복음 전파하는 일이라면 죽는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갔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영혼 구원에 생명을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에 들어서면 스데반의 설교가 나오고 설교 후에 이어서 스데반의 순교가 진행됩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하여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사도를 제외한 모든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흩어짐은 복음의 확장으로 연결됩니다.

제대로 된 한 사람의 일꾼이 세워졌을 때 문제 많던 교회가 안정이 됐습니다. 말씀이 흥왕 하게 됐고, 수없이 많은 자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일꾼이 순교의 피를 흘릴 때 복음의 놀라운 확장을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의 스데반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광성교회의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우리 광성교회의 큰 인물이 누구입니까?

♬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가진 것 모두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스데반처럼 사용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21세기의 스데반으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우리광성교회의 스데반으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우리광성교회의 큰 인물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이런 고백이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시어 주님께 제한 없이 쓰임 받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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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
2018. 4. 29. 23:22

맛디아 성경인물이야기2018. 4. 29. 23:22

뜻:하나님의 선물
예수의 단체에 가입한 사람으로 예수의 교훈과 사적에 대하여 증거할 수 있을 만 한 자로 인정되어 가롯유다 후임으로 선정되었다(행1:23, 26).

(원문보기)

마지막 사도 맛디아의 영성생활 (행 1:15-26)

서 론 : 마지막 사도 맛디아(Mathias)는 '하나님의 주신자(선물)'이란 뜻으로 초대 예수의 단체에 가입한 사람으로 예수의 교훈과 사적에 대하여 증거할 수 있을만한 자로 인정되어 가롯 유다의 후임으로 선정되었다(행 1:23, 26).

1. 사도 맛디아의 배경 : 맛디아(Mathias)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이름은 예수님의 원제자 마태와 같은 이름이다. 맛디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받은 12 제자는 아니었지만 70문도 중 하나로 예수의 단체에 가입한 사람으로 예수의 교훈과 사적에 대하여 증거할 수 있을 만 한 자로 인정되어 가롯유다의 후임으로 선정되었다(행 1:23, 26). 이제 사도는 예수님을 친견한 12명의 범위를 벗어나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제자로 부름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뒤를 따라 가는 여러분들도 예수의 제자라 불리우는 것이다.

2. 사도 맛디아의 생애와 업적
1) 부르심 : 맛디아가 어떤 자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자’라는 뜻이다. 부모가 기도로 얻은 자인 것 같다.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 받지는 못했으나 유다를 대신할 제자로 가입해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긴 자였다. 유다가 빠지므로 12제자의 자리에 영광스럽게 들어가 주님을 섬길 특권을 누렸다. 주님께 선택되어 쓰임 받는 것은 큰 영광이고 특권이다.

2) 그의 삶 :
(1) 함께 다니던 자 - 그는 본래는 12제자는 아니었으나 70인 제자에 속해 12제자와 더불어 늘 주님을 좇아 다니며 섬겼고 예수님의 모든 행사를 직접 보고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며 가르침을 받고 모든 행사를 체험해야 한다. 이런 체험이 있는 자만이 참 제자이고 예수님을 힘있게 증거하고 섬길 수 있다.

(2) 부활을 증거한 자 - 그는 예수님 생애의 중요한 모든 사건인 침례와 죽으심을 함께 하고 보았을 뿐 아니라 부활도 본 자이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고 생생히 부활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인가? 십자가 죽음 뿐 아니라 부활이었다. 십자가 보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부활을 더욱 힘있게 증거 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죽음이 주관치 못하고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기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로마서 4장 25절이 말하듯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준바 되고 우리를 의롭다하고 거룩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하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십자가 뿐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부활을 더욱 힘있게 증거 해야 한다.

(3) 제자들의 천거를 받은 자 - 그는 제자들에게 신뢰받고 사랑 받는 자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빈 자리를 보충하려 할 때 모든 제자들이 망설이지 않고 기쁨으로 맛디아를 천거했다. 주님에게 신뢰받고 사랑 받는 자는 사람에게도 신뢰를 받고 사랑을 받는다. 주님의 제자는 신앙 때문에 핍박받는 것 외에는 인격과 삶을 인해서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한다. 사회적으로 흠이 없어야한다.

(4) 제비 뽑힌 자 - 사도들은 말씀을 통해서 가롯 유다의 빈자리를 보충해야함을 깨닫고 임의로 보충한 것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아 합당한 절차를 거치고 합당한 방법으로 합당한 자를 세웠다. 말씀대로 모든 자들이 기쁨으로 참여하고 기도함으로 그가 뽑혔을 때 기쁨으로 받고 어떤 반대나 원망이 없이 다 인정하였다. 제자들은 어떤 과정과 방법으로 제자를 보충시켰나?
① 주의 말씀과 감당할 사명에 부합하게 자격기준을 정했다.
② 자격 기준에 부합한 자를 복수로 추천 받았다.
③ 하나님이 그들을 살펴 정해주시도록 기도로 의탁하고 제비를 뽑았다.
그래서 주의 뜻과 선한 인도로 맛디아가 뽑혀 12제자로 더해졌다.(잠 16:33) 이는 그의 자연적 장점과 특성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특별한 은혜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딤전 1:12) 그는 은혜로 제비 뽑혀 맨 나중 12제자로 가입되었기에 은혜에 감격하며 더욱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고 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제비뽑기는 교회에서 직분자를 뽑는 모델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분별이 된다. 이는 구약적 방법이었으며 성령 강림 이후가 아닌 이전에 있었고 성령강림 이후로는 어디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오순절 이후 교회에서는 결코 제비뽑기로 일꾼을 세우지 않았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성령님이 세운다고 했다. 교회는 성령이 세운 일꾼을 주님이 정하신 자격기준에 의해 분별하고 받아들여 세우고 인정하고 격려하며 기도해주고 순종해야 한다. 맛디아가 채워지므로 12제자들은 견고히 연합하고 분담해서 더욱 힘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나 하나가 보태져 함께 할 때 교회가 힘을 얻고 더 성숙하고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가 있다. 나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업신여기지 말라.

3) 그의 죽음 : 그의 말년과 죽음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없어 잘 알 수는 없다. 전승에 의하면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하였고 에디오피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한다. 그는 그곳에서 수없이 핍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고 마지막은 나무에 매달리고 목이 졸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께 충성하고 장엄하게 최후를 마쳤다.

3. 사도 맛디아에게서 배우는 교훈 : 12제자바사바와 맛디아는 당시 가룟 유다가 비운 사도의 자리를 메울 보선 후보로 뽑혔는데 사도는 한 사람만 부족하기 때문에 제비를 뽑은 결과 맛디아가 선출되었다.
1) 겸손과 순종 : 맛디아는 제자의 자질이 풍부한 인물이다. 그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는 날까지 줄곧 주님을 따랐고, 당장의 지위와 신분이 없어도 위축됨이 없었다. 주님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단체를 이탈하지 않았다. 여기서 맛디아의 겸손과 순종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주님을 믿은지 오래되었지만 교회에서 뚜렷한 직분이 없는 사람들이 과연 처음부터 시작할 때의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며 열심히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2) 한 마음으로 일함 : 맛디아가 열한 사도의 대열에 동참하자 즉시 한마음 한 뜻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평소에 묵묵히 제자의 길을 닦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대열에 가담한 후에도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서 사도의 업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가 만일 오랫 동안 이름 없던 때를 견디지 못해 원망을 하거나 불평을 했다면 보선을 할 때에 여러 사도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지 못함을 근심하라"는 말이 있다. 남이 자기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면 한 마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장에 맛디아란 이름이 기재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사도들 가운데 묻혀버렸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모든 사도와 함께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사도로 보선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령께서 온 교회에 충만히 임하셨다. 이것을 보면 그가 다른 사람과 한 마음이 되어 열심히 일을 했었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보선이 사도들간의 혼란을 유발시켰다면 조그만 누룩이 전체에 번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과연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셨겠는가?

3) 위험을 감수함 : 사도들은 제자들 중에서 존경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핍박의 주요 대상이었고 군중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사도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핍박을 당하거나 생명의 위험이 있어도 감내할 각오가 없이는 안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핍박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에도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사수했다. 주의 정병으로서 세상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의무이다. 우리는 함께 이 멍에를 질 각오를 해야 한다. 바사바와 맛디아는 같이 뽑혔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께 사도로 선택받았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발견되지 않는다. 사도가 되었든지 되지 않았든지 간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듯이 이뤄지기만을 원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은 것이다.

결 론 : 우리는 비록 예수님 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고 오늘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제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제3의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제 1의 제자가 원사도 12명 이었다면 제2의 제자는 맛디아였다. 오늘 우리는 모두 제3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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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
2018. 4. 21. 19:56

데오빌로 성경인물이야기2018. 4. 21. 19:56

뜻 :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낸 수신인으로(눅 1:1, 행 1:1) 로마의 기사 계급이며 누가와는 절친한 사이다.


(원문보기)


누가와 데오빌로 행 1:1-5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다룬 ‘성령행전’이요, 뜨겁고 쉴 줄 모르는 기도의 사역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기도행전’이며, 또한 성령 받은 평신도들의 헌신을 다룬 ‘평신도행전’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도행전 전반부의 주 인물인 베드로와 후반부의 주 인물인 바울의 괄목할만한 사역들도 이런 평신도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의 종들을 도와 헌신하는 평신도들이 없다면 한 시대에 큰 흔적을 남긴 위대한 목사, 선교사, 교사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평신도행전’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데오빌로’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복음 1장과 사도행전 1장 전반부에 두 곳에서만 간략하게 기록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것에만 근거하여 ‘데오빌로’가 과연 어떤 평신도였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족적인 배경 

첫째로, 데오빌로는 귀족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절에서 누가는 데오빌로를 “각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다른 곳에서 바울은 벨릭스와 베스도에게 “각하”라고 불러 경의를 표 했습니다 (23:26; 24:3; 26:25). 그러므로 우리는 벨릭스와 베스도가 당시 총독이나 왕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데오빌로도 그에 상당하는 신분이었던 것을 쉽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런 신분으로 미루어보아 데오빌로는 또한 많이 배운 사람이요, 부자요, 큰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언제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서문에 데오빌로 각하에게 그 책을 증정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후 60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데오빌로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회를 얻어 데오빌로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를 믿었습니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는데, 부와 귀를 동시에 누리고 있는 데오빌로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우리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이 배웠고 존귀한 신분과 큰 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많이 배우고 존귀하며 부자인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이나 고넬료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 외형적으로는 교만할만한 요소들이 많았지만 심령들이 가난해져서 외형적으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천하며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들은 지식인들, 고위관리들, 부자들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때문에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복음을 들어야 하고 또 구원 받아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친구 

둘째로, 데오빌로는 진정한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원래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였던 ‘조셉프스’ (Josephus)는 ‘고대사’ (Antiquities)라는 책에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 썼다고 증거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의 원래 이름이 ‘데오빌로’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후에 그가 예수를 믿고 바뀐 이름인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먼저 책 (누가복음)에서 그를 “각하”라고 불렀는데, 사도행전을 기록할 즈음에 와서는 그냥 “데오빌로여” 하고 불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시기를 주후 63년부터 70년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0년 사이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먼저 책에서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를 소개하느라고 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 “각하”라고 했지만, 이미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된 후에는 그렇게 부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한 형제처럼 아주 다정하고 친근하게 “데오빌로여” 하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귀족과 평민 사이의 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형제 사이요, 그런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형제 관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해준 사람과 복음을 전수받은 사람의 관계로 발전했던 것 같습니다. 

현대 교회도 이 점을 본받아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라면 몰라도 적어도 교회 안에서만은 어떤 계층 (class)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차이,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의 차이, 권력을 가진 사람과 눌린 삶을 사는 사람의 차이 등 어떤 차이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복음 안에서는 평등해야 합니다. 단지 모두가 다 형제요, 자매로 대하고 대해져야 합니다. 그런 곳이 진정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셋째로,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누가처럼 바울 사도를 끝까지 돌보며 도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바울의 가장 가깝고 신뢰할 수 있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의 사역을 거의 다 바울 사도와 함께 동역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 투옥되었을 때 많은 제자들이 바울의 곁을 떠났지만, 누가 만큼은 끝까지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는 바울 사도와 동행하다가 데오빌로를 만났을 것이라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어느 도시를 가든지 제일 먼저 유대인들이 있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곤 했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어느 회당에선가 데오빌로를 만났을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봅시다. 고넬료라는 사람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행 10:2)고 말합니다. 후에 베드로를 찾아간 그의 하인들이 그를 보고 “그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온 유대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22)라고 소개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 곧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는 회당을 찾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그대로 실천했던 사람이어서 이방인을 멸시하는 유대인들조차도 그를 존경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데오빌로도 유대인 회당에 나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다가 누가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누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았습니다.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데오빌로가 예수를 믿고 난 후의 삶에 대해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1. 그는 누가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주경학자들이 데오빌로가 누가의 사역에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가진 위치와 물질 등으로 복음전도 사역과 선교 사업을 후원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그런 중요한 후원자에게 두 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써서 증정한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의 복음전도 사역과 선교 사업에 이런 후원자들이 필요합니다. 물질, 시간, 기도로 헌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확장해나가는 평신도들이 필요합니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한 사람의 이름이 그것도 고위직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 공개적으로 알려진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그런 이유 때문에 한 밤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왔습니다 (요 3장).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옥에 갇히기도 하고 핍박을 받기도 하며 심지어는 사자 굴에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공개적으로 이름이 거론되어도 그것을 감수할 정도로 믿음이 원숙한 사람이요, 복음을 위해서 지위는 물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였습니다. 하루는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구원에 대해 묻는 그에게 예수님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고 난 후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여 떠났다”고 말합니다. 이 청년은 마음 한 구석으로는 예수를 따르고 싶었지만 자기가 소유한 재물 때문에 그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이에 비하면 데오빌로는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더 나아가서 복음 전도 사역과 선교 사업을 위해 데오빌로처럼 후원자가 되십시다. 데오빌로처럼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를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제자가 되십시다.[최완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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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
2018. 4. 11. 12:58

베드로(시몬) 성경인물이야기2018. 4. 11. 12:58

베드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뜻 : 반석 


(1) 신분:벳세다인 요나의 아들. 안드레의 형제인데 본명은 시몬이다.
수리아어로 게바라고 예수님이 개칭하셨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다.
즉 반석이라는 뜻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어업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족과 생업을 버리 고 주를 따라 12제자중 수위를 차지했고 야고보와 요한으로 더불어 친근 하였으며 그의 행적과 공로가 지대하다(요1:41-44마10:2마17:1막5:37,막14:33).

(2) 인간상:그 성격은 정열적, 충동적이고 화고한 결심과 순간적인 주저와의 중간에서 동요로 인한 많은 실패가 전해지고 있다.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선두에서 맹세하고도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한 것이 그 예이다(막16:50, 72-77마16:22갈2:12).
바다위를 걸어 주님에게 가다가 풍랑을 보고 무서워함(마14:29-30).
타인보다 먼저 주님을 메시야라고 말하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음(마16:16-18).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언하실 때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간하다가 책망을 받음(마16:22) 변화산에 올라가서 장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에게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주고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그대로 살자고 하였다 (마17:4).

(3) 교훈:순수한 일신론을 주장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택하였으며 그리스도가 이방인을 교화 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셨다고 하였다.
사도중 대표적인 발언자로 성령의 역사를 받으라고 하였다.

(4) 선교상황: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후 40일간에 11차 나타나시는 중 베드로는 7차 만났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중 가롯유다 후임을 택하는 일을 주장했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전도하기시작 했다.
하루 삼천 신자를 얻고 기사와 이적을 많이 나타내고 신도들이 유무상통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행1:12-2:).

성전 미문에 나서면서 앉은 뱅이 된 자를 고침(행3:1-7).




베드로 교훈


사람이 세상에 태어 날 때 타고난 성격이 아니면 자라나면서 형성된 성격은 그 자신의 삶에 한 평생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 성격이 자신의 살메 좋은 영향을 주는 면이 있고 그 성격이 자신의 삶에 나쁜 영향을 주는 면도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볼 때 베드로 처럼 그 자신의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람은 극히 드물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그 성격은 좋은 면으로 나타날때는 최대의 장점이 될 수 있었고 나쁜 면으로 나타 날때는 최대의 약점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우선 베드로는 대단히 급한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급한 성격으로 인하여 좋은 일에는 앞장을 선 경우도 있었고 실수 할 때는 또한 여지 없이 넘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급한 성격이 그의 신앙생활에서 장점으로 나타난 경우를 우선 성경을 통해서 많이 볼 수 있다. 예컨대 마 14장에 갈릴리 바다위에서 한 밤중에 다른 제자들과 노를 젓고 있을 때 물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모두들 유령이라고 벌벌 떨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이때 베드로는 만일 주시거던 저도 바다위로 걸어 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오라 하실 때 그는 서슴없이 물위에 발을 내밀어 물위를 걸었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던 것이다. 그 배에는 다른 제자들도 많이 있었으나 물위로 걸었던 제자는 오직 베드로 뿐이었던 것이다.

또 마 16장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앉아 조용히 묻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더이다, 혹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더이다고 했다. 그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물음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 앞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대답을 했다.

이때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복이 있도다 너를 베드로라 즉 반석이라 부를 것이요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요 천국 열쇄를 주리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하셨다.

또 성경에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졌지만 그날 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한채 그물을 거두려고 하는 새벽에 예수님이 바닷가에 오셔서 그물을 깊은데로 가서 던져라고 했을 때 그가 답하기를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여도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하고 순종했다가 거물에 가득차게 고기를 잡은 적도 있는 것이다.

정말 베드로의 성격이 순종하고 헌신할 때는 장점이 되어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에 늘 앞장서는 자가 되었고 주님의 칭찬을 받고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 단점으로 나타날 때는 그의 조급한 성격은 늘 사탄의 이용물이 되었던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주님의 칭찬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을 붙잡고 십자가를 지지 마시도록 간하다가 사탄아 내뒤로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 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어찌하나남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느냐고 책망을 들었던 것이다.

또 성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에 베드로 차례가 되자 주여 절대로 내 발을 씻기지 못하리이다 고 말을 한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내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금새 그의 말이 바꾸어 져서 내 발 뿐 아니라 내 온몸도 씻어 주소서 라고 했다.

또 주님께서 성만찬의 자리에서 오늘 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릴찌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했다. 그때 주님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나를 새번 부인할 것이라고 했을때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결국 그는 세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 밀을 까불듯이 너를 시험할 것인데 나는 너를 위해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겠다고 하셨다. 정말 베드로가 신앙이 없을 때는 사탄의 손안에서 조롱당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어떤 성품이든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될 때 그 성격은 자신의 장점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어떤 성품이든지 자신을 위한 성품이 되면 그 성격은 분명히 자신의 단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 베드로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1. 자신을 과신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베드로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하는 우월감을 가졌을 때가 많았음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이다. 그래서 다 주님을 버릴찌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 중에 등장하는 말 중에 [나] 라고 하는 말이 문제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자세는 영적으로 볼 때 가장 사탄이 이용하기 쉬운 자리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바래새인들의 자세에서도 바로 그러한 생각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받아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기도에도 나는 저 세리들과 같지 아니합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드러내기를 좋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은혜를 잃어 가는 것이다.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아니면서도 꼭 같은 증상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오늘 가상 충성자들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성자 같은데 주님앞에 설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성도인 것이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 보다 낳다고 생각했을 때는 실제로 다른 제자들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었을 때 였다. 시험이란 대체로 여기서 부터 출발한다. 다른 사람들 보다 내가 더 낳다는 생각이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다른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나도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조심하고 경성해야 한다고 했다. 성경속에는 자신을 믿고 있을 때가 항상 넘어짐의 시기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2. 시험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한 환경은 이러한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선 베드로는 빌라도의 법정이 아닌 가야바의 집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가야바의 법정은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 아니다. 재판은 결국 빌라도의 법정에서 최후의 판결이 나게 되어 있다. 즉 베드로는 이미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바의 집에서 주님을 부인했던 것이다.

또 칼을 든 군인이 베드로를 붙잡고 위협을 했더라면 베드로가 본능적으로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도 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질문한 사람은 계집아이였다. 그런데 베드로는 맹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베드로는 이미 마음으로 주님을 모른채 하기로 생각하고 그 가야바의 집에 들어 갔던 것이다.

이것은 그후 그가 변화를 받아 공회 앞에 서서 내가 너희말 듣는 것이 옳은 가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가 결단하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 한 것을 비교하여 보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베드로는 헤롯에게 체포되어 다음날 사형에 처해 질찌도 모르는 그 밤에 옥중에서 수족이 결박되고 보초들이 지키는 가운데서도 깊이 잠들어서 천사가 옆구리를 칠때 비로써 깨어 났던 그 담대성과 비교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 할 때에 환경은 문제가 아니었다. 성경에 많은 신앙인들이 넘어지는 것은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었고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며 신앙 승리의 모든 요소도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이 승리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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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ijoseph
2018. 4. 7. 20:57

(사도)요한 성경인물이야기2018. 4. 7. 20:57

사도요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뜻 :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예수의 12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야고보와 형제이다.


(1)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는데 이것은 그의 과격한 성격 때문인 듯 하다(막3:17, 9:38, 눅9:54-:5). 

(2) 예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다(요21:20) 

(3) 그는 베드로,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의 측근자였으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와 동반되었다(막5:37, 9:2, 14:33). 

(4) 요한 복음과 요한 서신을 썼으며 말년에는 밧모섬에 유배되어가서 요한 계시록을 썼다.


    2] 사도 요한 <홍만조목사 글>

    1. 요한의 이름

    레오날도 다빈치(Leonardd da Vinci)는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소녀처럼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흰 손을 겹치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그렸다. 십대의 말기에 주 예수를 만났을 때에는 비록 사도들 가운데서 나이가 가장 어리며 나약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요한은 용감하고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다(막 3:17). 이 형제들의 활화산 같은 성품은 주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했을 때 잘 나타났다. 또 이 형제는 앞으로 올 왕국에서 높은 자리 둘을 주십사고 예수께 간청하는 절제 없는 야망을 갖기도 했다. 주 예수는 이들의 불 같은 열망과 경건하지 못한 욕심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삼년간 훈련시켜 폭풍 같은 성격을 잠재웠으며 우뢰를 조용하게 변화시겼다.

    2. 요한의 초기 생활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았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다(마 10:2). 고기잡이는 근육을 발달시키는 힘든 노동이었다. 거센 파도를 헤치면서 노를 젖기 때문에 손바닥에는 못이 박혔다. 또약볕 아래서 그물을 수선하는 일은 청년들을 구리빛으로 만들었다.

    안드레와 함께 요한은 밥티스마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께 인도되었다. 예수님과 몇 말씀을 나눈 요한은 그가 구세주임을 확신하였다. 요한은 육십년이 지난 뒤에도 처음으로 예수님과 대화한 감격적인 시간인 시간을 회상하였다. 이 순간부터 예수님은 요한의 생애에 빛이 되셨다. 사랑이란 서로 주고 받는 보완관계이다. 요한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난 후 요한은 고기잡이하러 돌아왔으나 나중에는 예수님과 동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요한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큰 마음을 먹고 아버지와 배와 고기와 직업을 버렸다.

    3. 편협한 마음(막 9:38-40, 눅 9:49-50)

    어느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던 중에 요한은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가 보려고 요한은 앞으로 다가갔다.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 위를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낮선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다. 그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 다가 조용해지더니 고쳐졌다.

    요한이 귀신을 쫓으려 했을 때 깜짝 놀란 낯선 사람에게 큰 소리로 "감히 어떻게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쓸 수 있단 말이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능이 있길래 그런일을 하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권세도 받지 못한 사람이요. 나는 주님의 가까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요. 이전에 나는 당신을 본 일이 없오. 결코 주님의 이름을 쓰지 마시오"라고 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도 없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일도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요한은 몰아쳤다. 요한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열아나이다"라고 여쭈었다(막 9:38).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한자니라"(눅 9:50)고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병고치는 이 사람은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 전문적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임을 예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행 19:13-14). 이 사람은 어디에서인가 예수의 말씀에 감동을 받은 성실한 사람 이었으며, 곤고한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흉내내어 보려는 사람 이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사도들과 동등한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느지도 모른다.

    요한의 성격이 외곬수적인 것은 가장 높은 자리에 대한 그의 야망이 연장된 결과였다. 그는 사도로서의 자부심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막 9:39). 요한은 주 예수의 이름을 의탁하여 주 에수의 일을 행하는 데 제자 아닌 사람을 제외시키려는 계획을 성공하지 못하였다.

    열 두 사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부인하지 않은 것은 성도들에게 대단히 훌륭한 교훈이 된다. 마치 사도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며 무리를 만들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물론, 우리는 믿음의 근본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을 행하는 것에 찬성할 수 없다. 말년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지지하는 행위에 대하여 강경한 경고를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과 똑같이 행하면서도 신학적인 문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마음을 용서하고 관대할 필요가 있다. 자기가 속한 종파만이 오직 진실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우리들과 꼭같지 않다고 하여 침례교이든, 감리교이든, 루터란이든, 오순절 계통이든, 성공회이든 배척할 정당한 근거는 없다.

    4. 요한의 변화

    어느 정원사가 정원의 흙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느냐?"고 물었더니 진흙은 "사람들이 나를 장미꽃 옆에 두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성급한 청년 요한은 성인이 되어 온유한 성격으로 변하였다. 요한의 야망은 줄어들었다. 편협한 외곬수적 성격도 사라졌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격렬한 성격의 청년에서 마음 착한 성인이 된 것이다.

    신학자들은 요한이 복음서 뿐만 아니라 서신과 계시록도 썼다고 믿는다. 약 일 세기 전에 일부 학들이 "요한서신을 쓴 사람이 과연 사도 요한이냐"하는 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복음서의 요한과 서신의 요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네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요한을 야망으로 가득 차 있고 화를 잘 내며 도량이 좁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비하여 요한서신의 기록자인 요한은 사랑의 정수라고 설명되어 있다. 요한은 주 예수에 의하여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하였다.

    요한이 이렇게 변하는 데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의 인격 속에는 타고난 성격이 항상 깃들어 있기 때문에 폭발적인 잠재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함께 해주시는 권능과 근엄한 용모는 여러 갈래로 찢어진 요한의 옳지 못한 정력을 온유한 길로 인도하였다. 유리들의 정력은 결코 옳기만 하지더 않고 나쁘기만 하지도 않은 그 중간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쁜 방향으로 쓰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요한의 강력한 정신이 거짓 교리나 사악한 행동에 대하여 단호히 규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의 성품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격려를 해 준다.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불평하기 좋아하는 청년이라 해서 반드시 고집세고 이기적이며 잘 투덜대는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영적인 성장법칙에 따라서 떫고 시퍼런 과일이 달콤하고 맛좋은 과일로 익을 수 있는 것이다.

    5. 요한이 보여준 사랑

    우뢰와 같은 요한의 성격이 온유하게 변한 것은 십자가와 초대교회에의 성심과 용감성도 설명해 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어느 사도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요한이었다. 베드로가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을 때 요한은 용감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다(요 18:15-16). 아마 대제사장은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의 사업과 롼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과는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대제사장을 알고 있던 덕택으로 요한은 베드로도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따.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을 해쳤기 때문에 겁에 질려 베드로가 숯불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재판장에게로 곧장 들어갔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때 요한은 진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사도 가운데서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고 적들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뿐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다>(요 19:26-27)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마리아를 모셔온 후 요한은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려고 서둘럴 되돌아갔다.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 보았다. 군병이 에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 뿐이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6. 서로 사랑한 에수님과 요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몇몇 사도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셨던 것같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갖는 게 기뻐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끼리 점점 친밀해진 것은 큰 무리들로부터 더욱 독자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오백여 형제이며(고전 15:6), 모인 무리의 수는 일백 이십 명이고(행 1:15), 예수께서는 칠십 인을 제자로 세웠다.(눅 10:1). 이들 가운데 열 두 사도가 있으며 사도 가운데 핵심이 되는 세 사람이 있으며 이 중에서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주 불리워졌다(요 13:23/20:2/21:7). 요한은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다"는 이름의 뜻 그대로 일생을 살았다.

    분명히 요한은 제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세 제자의 한 사람일 뿐아니라 에수의 사랑받는 제자로 불리워진 유일한 사람이며 다락방에서는 그리스도의 품에 앉았다(요 13:23). 초대교회의 문헌을 보면 요한을 에수의 가슴에 기댄, 사랑을 의미하는 "에피스테티오스"(The Epistethios)라고 자주 부르고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라는 부탁을 받은 요한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전에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사람이 되었다.

    1)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3:16)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겼다. 요한은 책임감으로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도직의 징표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가"(요 13:34-35)하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상기시켜 주었다. 요한은 그의 저술에서 오십 번 이상이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었으며 밤을 새워 고리를 잡은 후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본 제자였다(요 20:8/21:7). 요한은 하나님 계시의 환상을 포함한 영적 진리를 알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받았다.

    2)요한의 사랑은 강했다.

    사랑에 대햐어 요한이 요약한 말은 사랑의 근간을 이루었다. 진실한 사랑이란 그 사랑의 대상을 해롭겔 할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하며 결코 꺽이지 않는 강한 것이어야 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나운 개로부터 아장아장 걷는 자기의 아이를 보호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진실한 사랑이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그릇된 가르침이 어린 아이들에게 크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요한은 거짓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슴치 않고 경고했다(요일 1:6/2:4).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부했다.(요이10). 또 디오레베는 교만하여 사악한 말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세상에 공개했다(요삼 9:10). 요한의 우뢰 같은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강경한 어조도 사랑과 겸손으로 많이 부드러웠졌다.

    (이야기)// 어떤 전설은 요한이 에베소에서 공중목욕탕에 갔을 때 영시주의자인 세린도를 만난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요한은 그를 보자마자 목욕도 하지 않은 채로 목욕탕을 뛰쳐나오면서 "모두 도망치자, 진리의 적이 들어있는 세린도 때문에 목욕탕이 무너질런지도 모르니 우리 모두 도망가자"고 외쳤다고 한다. 어떤 기회에 요한은 세린도를 "마귀의 맏아들"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뢰와 같은 그의 성격의 단면을 잘 반영하고 있다. 요한은 온유하면서도 강했다. 박식하면 격한 마음이 가라앉지만 요한의 사랑은 예리한 통찰력과 지식 에의하여 퇴색하지 않았다.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섯권의 책을 쓸 수 있었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요한에게는 "그리스도인 플라톤"(ChristianPlato)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삼 세기의 교부들은 계시록의 필자에게 "신학자"란 칭호를 붙였다.

    7. 말년의 요한

    소아시아 태생으로 요한의 제자이면서 폴리갑(Polycarp)과 잘 아는 이레니우스(Irenaeus)는 요한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을 독살시키려는 음모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한다. 이 전설은 뱀이 그려진 성찬배가 요한을 상징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 다른 전설은 핍박받는 동안에 끓는 목욕탕에 던져졌으나 요한은 그 속에서 살아났다고 한다.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에게 해 복판에 있는 아름다운 섬인 밧모에 요한이 유배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요한은 계시록의 인사말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에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라고 썼다. 밧모섬에서 도미시안 황제에 의하여 추방된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 대한 멧세지를 받고 환상을 보았다. 순교자와 성도와 하늘의 승리를 본 요한의 마음은 기뻤다. 계시록의 마지막인 22장에서 요한은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라고 썼다(계22:8)

    트라얀(Trajan) 황제는 요한이 밧모를 떠나서 에베소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소아시아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선교사업은 그의 목숨이 다할 때 성취되었음을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알 수 있다. 요한은 자기의 영적인 자식들이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요한은 충분한 보응을 받을 것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들에게 충고했다. 요한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의 선행과 디오드레베의 교만함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요한은 그의 영적인 자식들이 다른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증거하기를 원했다. 요한은 대단히 오래 살았다. 예수를 처음 따를 때 가장 어린 소년이었던 요한은 열 두 사도 가운데서 제일 장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죽었다.

    은혜 속에 살고 성장하는 것에 관하여 요한의 생애는 많은 교훈을 준다. 요한은 불 같은 성급한 성격을 서서히 가라할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세에 순종했다. 여든 살이 되어서라도 사랑하며 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8. 결론

    요한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성도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서 어떤 문제와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논한다면 "사랑의 훈련"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는가? 세 가지만 강조하겠습니다.

    1.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의 주님과 깊이 교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처럼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고동을, 그 사랑의 심장을 느껴 본적이 있으신지요? 글분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절에 사도 요한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의 가슴에 깊이 기대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 주님의 호흡을 느낄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주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의 확인과 확신없이 사랑의 지속이 어려운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3.사랑은 실천할수록 증가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줄수록 늘어납니다. 사랑의 생리는 사랑을 줄수록, 내 사랑의 창고를 계속 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격정적이고 사나웠던 성격의 소유자 요한은 그 격정이 주님께 포로가 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주님의 성령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을 때, 그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사도로 변모하게 되었느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구스타프 도오르라는 유명한 화가가 주님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떻게 주님의 초상화를 그릴까라고 안탔까워 하고 있을 때에 그를 사랑했던 , 예수를 잘 믿는 믿음의 친구가 그에게 찾아와서 이런 유명한 충고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자네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나, 그러면 자네는 주님의 형상에 더욱 가까운 주님의 모습을 그릴 수가 있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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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