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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미 153 뜻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송삼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볼펜 시제품을 만들고는 직원들에게 이름을 공모했다. 직원들은 모나미물감이 인기가 좋으니 그대로 모나미로 쓰자고 했다. 프랑스어로 ‘나의 친구’인 모나미. 이름은 monami로 정했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monami 뒤에 뭔가를 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송삼석은 아이디어 회의를 소집했다. 직원들이 다양한 의견을 냈다. 

‘1963년에 태어났으니 모나미 1963으로 하자’ ‘5월 1일 태어났으니 모나미 501이 어떠냐’ ‘행운이 따르라는 의미에서 모나미 77로 하자’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그렇지만 송삼석의 마음에 쏙 드는 게 없었다. 그때 남자 직원이 “153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송삼석은 153을 반복해 보니 어딘가 익숙하고 발음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 의미가 전혀 와닿지 않았다. 송삼석은 그 직원에게 도대체 153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 남자 직원은 화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화투에서는 갑오(9)가 최고인데 9를 만드는데는 225, 234, 135보다 발음하기에 153이 좋다는 얘기였다. 직원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남자 직원에게 ‘뭐 그런 아이디어를 내냐’는 식으로 눈총을 주었다. 그런데 송삼석은 153이라는 숫자가 너무나 낯익어 저 숫자를 어디서 보았지 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송삼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성경을 찾아 요한복음 21장 11절을 펴들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53은 기독교에서 예수의 말씀을 따르면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였다. 송삼석은 이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전율했다. 더이상 고민할 게 없었다. 송삼석은 최초의 볼펜 이름을 모나미153으로 정했다. 송삼석은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하나님은 내게 153이라는 숫자를 통해 기업인이 일생을 통해 반드시 지켜야 할 상도(商道)를 일깨워 주었다”고 썼다.


:
Posted by ijoseph
2018. 4. 7. 20:44

황당한 유인원 조작극 창조과학2018. 4. 7. 20:44

(원문보기)
황당한 유인원 조작극
 임번삼
명지대학교 외래교수
전 대상그룹 식품당당 대표이사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많은 유인원들은 과학적 주장보다는 상상, 혹은 조작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속속 들어나고 있다. 이번 호에도 지난 호에 이어 대표적인 유인원의 허구에 대해 소개한다.

 ◆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도구를 사용한 사람)

 선교사의 아들인 루이스 리키는 중동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유인원의 유골을 발굴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이 작업에 부인인 메리 리키와 아들 리차드 리키까지 온 가족이 동원됐다. 루이스와 메리(1961)는 최초의 도구를 사용했다는 '호모 하빌리스'를, 리차드는 'KNM-ER-1470(1972)'을 발굴했다.

 그러나,전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유사한 동물의 뼈로 알려져 있으며,북경인보다 더 현대화 된 KNM-ER-1470의 유골(2백80만년전)은 그 보다 더 아래 지층에서 현대인의 석조물들이 발굴됨으로써 연대산출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더구나,포타슘-아르곤법으로 측정한 유골의 연대는 29만년에서 2억2천만년의 넓은 편차를 나타냈으나,그들은 몇번의 수정 끝에 1백 80만년 전으로 설정했다. 실험치가 아닌 토론으로 연대를 책정한 것이다.

 ◆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직립보행하는 사람)

 호모 에렉투스로 구분되는 '자바인', '북경인', '필트다운인' 역시 조립 및 사기극으로 점철돼 있어 우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 중 대표적인 몇가지 사례만 소개한다.

 ◆ 자바인(Pithecantropus erectus,직립보행하는 유인원)

 네덜란드의 내과의사였던 듀보아는 19세부터 독일의 예나 대학에서 '진화론의 예언자'라는 헤켈에게 7년간 사사받았다. 헤켈은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하기 위해 여러 동물과 사람의 배(embryo) 발생도가 유사한 듯 보이게 하려고 정교하게 조작한,학문적 사기극을 연출한 사람이었다. 듀보아는 자국의 식민지였던 자바섬(트리닐)에서 1백여 명의 인부를 동원해 7년간 발굴작업을 했다. 처음 3년간 파낸 1만여 톤의 흙 속에서 마침내 어금니(1)와 두개골 편(1)을 발견했고,다음 해에도 15미터 인근지역에서 대퇴골을,1898년에는 다시 앞어금니를 발굴했다. 그는 서둘러서 이 유골들의 주인공이 50~1백만년 전의 한 유인원의 것으로 추리하고, '피테칸투로푸스 에렉투스'라 명명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스승인 헤켈과 동물학회에 보고했다(1895). 

 발표 당시에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독일의 저명한 진화인류학자인 케닉스 발트는 그 후에 같은 지역에서 듀보아가 발견한 것과 유사한 유골을 발굴해 검토하고  '듀보아의 두 어금니는 오랑우탕,앞 어금니와 대퇴골은 사람,치아는 원숭이의 것'이라고 발표했다. 듀보아 자신도 임종 직전에 자신이 발견한 유골은 긴팔원숭이의 것이라고 고백했다. 더구나,그는 와드잭 지방의 같은 지층에서 발굴했던 현대인의 유골을 30년간이나 숨겨왔다는 사실도 알려지게 됐다. 최근의 일본과 인도네시아 연구팀의 합동조사에 의하면,자바인은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나 현대인의 한 종족으로 추측되고 있다.

2003. 9. 6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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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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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1-9)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 


성경 속에 있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이 부르신 사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부르심의 사건, 만남의 사건은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도, 시골 촌뜨기 목동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건, 만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었던 기초도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 곧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거부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만남 속에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울처럼 크게 쓰임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사람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달란트만큼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가 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을 때에만 언제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 수 있고, 그 사건이 있을 때에만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 1절~9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울의 출생과 배경, 그리고 그의 열심 

'큰 자'라는 이름의 뜻을 지닌 사울은 당시 로마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던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한 자였습니다. 미국의 시민권자는 세계 어디를 가도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 받은 일들이 예전에 있었던 것처럼 로마의 시민권이란 그처럼 강력한 권한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자는 로마의 법 이외에는 어떠한 법령으로도 처벌을 내릴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런 권한을 부여 받았을 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로서 명망 높은 혈족의 후손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율법에 능통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바리새파 사람이요, 모든 히브리 민족들이 그러하듯 하나님께 대해 특출한 열심을 갖고 있던 자였습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3:4-6)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행22:3)
 

그야말로 남부러울 게 없던 사울이요, 온갖 출세가 보장된 사울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 자신의 열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때에도 산헤드린 의원들 너머로 지켜보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도 멀찍이서 목격한 장본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그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예수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기독교인들을 남녀를 막론하고 박해하고 잔멸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의 눈엔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자들이 자신이 믿는 유대교를 혼란케 하는 이단아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스데반이 신성모독죄의 덫에 걸려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는 증인으로서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활약상에 힘입어 예루살렘 시내에 들풀처럼 번져 나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내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색출 작전이 점차 성공을 거두어 들였다고 판단한 사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넘어 저 멀리 다메섹까지 겨냥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서 130마일에 달하는 거리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의 색출 포박 작전은 점점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듯 최고층에 속한 신분과 앞으로의 출세까지 보장된 사울에게는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부러워할 게 있다면 대제사장의 반열에 오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인생의 목표가 눈에 보이는 성공과 명예뿐이었으니, 산헤드린 의원들이나 대제사장에게 더욱더 잘 보이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는지, 사도행전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찾아온 주님의 모습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 9:1-2) 

사울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의 색출 진압 작전을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예전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포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서, 무려 6일씩이나 걸리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여러 명의 군사들과 함께 다메섹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른바 그들의 출발은 마치 적을 소탕하기 위한 군인들의 출정식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6일 중 3일이 지났는지, 4일이 지났는지 알 길이 없지만 다메섹으로 향하던 어느 날 그에게 빛이 둘러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은, 그가 뒤늦게 고백한 사도행전 26장 13절에 의하면, 중동의 정오 태양빛보다 더 강렬하고 눈부신 빛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빛은 자연계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라 진리 되시는 하나님의 빛, 생명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빛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9:3-4) 

하늘로부터 갑자기 내리비치는 그 빛에 의해 그는 땅바닥에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생명과 진리의 빛 앞에 감히 맞설 수 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육체의 성공과 명예만을 목적으로 하는 죄악 된 삶을 살고 있던 사울로서는 감히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비친 온통 하얀 빛깔 앞에 시커먼 자신의 실체를 가릴 수 없었던 사울은 그만 거꾸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의 온 귀에 우렁찬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4) 

사울은 그때까지도 직접적으로 나서서 예수님을 박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를 핍박할 때 멀찍이서 협조자로 나설 뿐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도 그가 전면에 나섰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세주가 어떻게 숨을 거두는지는 멀찍이서 지켜봤을 것입니다. 

그가 직접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 것은 스데반에게 신성모독죄를 들먹여 돌로 쳐 죽일 때 증인으로 나섰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포박하는 그 시점부터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박해자가 아니라 단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박해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모습을 예수그리스도 자신에게 한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일의 책임은 그 일을 주관하는 총책임자에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일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행한 일이듯,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자들의 행위도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 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감옥에 잡아넣으려 했던 것 역시 들풀처럼 번져 나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는 직접적인 박해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곧장 사울에게 다메섹 시내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누군가 네게 이를 것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사울은 그때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한 채 동료들의 도움에 힘입어 다메섹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의 죄성을 일깨운 주님의 빛과 음성 

이상과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줍니까? 사울이 주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아니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이른바 주님의 현현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울은 훗날 사도 바울이 되어 온 세계를 누비며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지 않습니까? 

그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가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이 말씀 속에서 전해 주고 있는 주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찾아와 주시고, 그를 만나 주지 않았던들 그 인생은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과 만나는 사건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이 왜 사울에게 중요한 사건일까요? 그 만남을 통해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 이 세상의 것들은 온통 상대적인 것들이요 오직 절대적인 것은 하늘에 속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 첫 번째 만남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은 어둠과 거짓을 밝히는 기능을 합니다. 빛은 생명을 키우는 역할을 합니다. 사울에게 찾아 온 주님의 빛은 이 세상의 상대적인 빛들이 다 거짓임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이전에 자신이 육체적으로 자랑해 온 율법의 빛이라는 것도,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추구하고 대제사장이 주장해 왔던 정의라는 것도, 실은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진리와 생명의 빛에 비하면 모두 더럽게 오염된 것들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 빛은 사울 안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더러움과 거짓된 죄악의 실체를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통해서만 자신의 영혼이 살 수 있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빛의 인도를 받아야만 참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 두 번째 만남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부르시면서 주님은 부활하신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또 병든 자들을 고치시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에게 쫓겨 다니고, 또 십자가에 처형되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분이 지금 부활하시어 너무도 당당하게,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엄으로 자신 앞에 나타나 부르고 있었으니 어찌 떨지 않을 사울이었겠습니까? 여태껏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핍박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던 그였으니, 부활하신 주님의 부르심 앞에 어찌 고개를 내밀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울을 향한 주님의 음성은 단순히 그의 박해를 책망만 하는 음성은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박해가 헛된 일임을 자각케 하는 사랑의 음성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없지만 다른 사본에는 5절 하반절이 있습니다. 

"그 박해가 소처럼 길길이 들이받고 날뛴다 해도 나는 끄덕도 없느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울의 박해가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음성입니다. 설령 주님께서 그 음성을 들려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울은 이미 주님께서 자신의 박해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빛으로 찾아오시고, 직접적으로 음성까지 들려주신 이유가 바로 자신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에 기인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임한 주님의 현현 

그런데 위와 같이 주님께서 찾아오신 사건이 비단 사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그리고 모세에게도 있었던 사건입니다. 75세가 되기까지 실패자 인생을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때까지 하나님을 박해하거나 하나님의 대적자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부르신 사건 자체가 아브라함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전에 자기 인생을 자기 능력과 힘대로 살아 보려 한 게 얼마나 교만한 삶이었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 삶 속은 하나님을 찾을 길조차 없었던 죄 된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 부르셨다는 것은, 이제는 그의 힘과 능력을 내려놓으라는 회개의 촉구요, 이후부터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라는 새로운 방향 전환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사는 길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부르심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는 또 어떻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까? 40살까지 애굽의 궁궐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자기 정의의 잣대로 애굽 병사를 쳐 죽인 채 땅에 파묻은 게 탄로가 났을 때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고, 그때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르기까지 지팡이 하나밖에 없는 빈털터리 신세로 살지 않습니까? 그런 어느 날 홀연히 호렙산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 불꽃의 모습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곧장 "모세야, 모세야" 하시며 당신의 음성으로 모세를 두 번씩이나 부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곧장 신발을 벗도록 명령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신발을 벗도록 했습니까?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에, 그의 죄인 됨의 상징인 신발을 벗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왜 그를 불렀는지, 모든 이유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모세가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기에, 그가 품고 있던 자기 정의의 기준들을 모두 벗도록 해 주셨기에,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는 자라야 흔들리지 않아 

이상과 같은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주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본문 속 바울과 같은, 똑같은 찾아오심이나 부르심이 아니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온 일들이 모두 헛된 교만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런 자각의 사건이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을 때 그때까지 품고 있던 자기 의의 기준들이 다 부질없는 것들이기에 버려야 할 것들임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런 자각의 사건이면 충분합니다. 본문 속 바울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찾아오셨을 때 그 자신이 온통 암흑 덩어리 죄인임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런 자각의 사건이면 족합니다. 

우리 자신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크게 쓰임 받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각자의 달란트가 있지 않습니까? 그 달란트 내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자각하는 사건입니다. 이른바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내가 자각하는 사건이요, 그분의 빛만이 나의 어둠과 죄악을 몰아낼 수 있다는 자각의 사건입니다. 

그것이 없이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칫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울의 열심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동족을 괴롭게 한다는 이유로 때려죽인 모세의 열정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열심과 선행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나온 일들이 아니기에 헛된 자산 사업에 그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늘 통로를 잇는 일이 되기 위해선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의 사건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이 위협해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신의 죄인 된 실체를 자각하고, 내 능력이나 힘으로 해 왔던 일들이 모두 교만한 일이었음을 자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내 의의 기준도 상대적인 의였음을 자각한 그 시점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일들이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겪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그냥 방치하지 않고 이끌어 올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 이후에 곧장 쓰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러서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배고픔과 추위와 배가 파선당하는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도 그리고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이었지만 그때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숱한 좌절과 넘어짐의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도 나이 80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통해 그 즉시 전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닙니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너 광야 40년 삶을 살기까지 숱한 좌절과 괴로움의 시간들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던 것은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각자의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들 속에 좌절과 괴로움과 어려움의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넘어지거나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 있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추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자각한 사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능력과 지혜를 믿고 살아왔던 교만한 인간임이었음을 자각한 사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정의와 의로움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다고 착각해 온 나의 오만함을 자각한 사건이 있습니까? 

그때 내게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사울에게 나타난 빛의 모습이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까? 모세에게 나타난 불꽃의 형상이었습니까? 그런 모습, 그런 형상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어떠한 모습이나 형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나의 죄인 됨을, 나의 교만함을, 나의 오만함을 내어놓고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본질이 용서 받을 수 있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있고, 그때부터 내가 행하는 일의 초점을 하나님의 뜻에 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 이후에도 내게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계획하는 일들이 뒤틀리고 무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근본적으로 망하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당신의 자녀들이 고생하며 근심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예레미야애가3:33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리라." (고후4:7-9) 

우리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없다면 이 시간 이후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내게 찾아오시도록, 그리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나의 죄인 됨을, 나의 교만함을, 나의 오만함을 토하는 사건이 있었다면, 이제부터 행하는 일들 속에서 만나는 어려움과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자녀 됨을 확증해 준 그 사건이 있는 한,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하거나 답답한 일을 겪는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섭섭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한 단계 승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리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참된 본심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들 각자에게 음성으로, 불꽃으로,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습니까? 
그들처럼 크고 위대하게 쓰임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내게 있는 달란트만큼만 쓰임 받아도 족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 있었는지, 
예수그리스도 앞에 죄인 된 모습을 들여다본 사건이 있었는지 점검하길 원합니다. 
진정으로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나의 죄인 됨을, 
나의 교만함을, 
나의 오만함의 실체를 비추어 준 사건이 있었습니까? 
없다면 그 만남의 사건을 갖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아 
우리에게 닥쳐 있는 고난과 어려움들도 기꺼이 이겨 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삶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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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ijoseph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도마가 한국에 왔었다.

좀 황당한 주장같지요?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가르쳐 줄 리 만무하니 말입니다.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인도를 거쳐 한국까지 사람이 다녀갔다고?

자, 이제부터 설명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도마박물관 조국현박사의 설명에 다른 전문가들의 자료를 보완한 것입니다.

김병모박사 *크리스챤 아님
http://i.imgur.com/zcN0Ynr.jpg
http://i.imgur.com/HlVjKre.jpg
조국현박사
1988년 가야국이 기독교국가임을 최초 발표. 삼국유사중 가락국기 해설, 가락국 20년 연구, 도마박물관 관장, 목회자

정학봉박사
한국역사철학자, 대신대 대학원원장, 인도 18회 방문하며 조국현 박사의 이론 입증.

이장식박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B.A), 장신대 신대원(Th.B), (Th.M), 서독 뮌스터대학 신학부
미국 하버드대학 신학부(Th.M), 미국 드류대학 대학원(Ph.D)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가 해양 실크로드의 마지막 항구인 땅끝 나라 한국 김해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습니다.

1. 도마의 행적
1) 도마는 40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하다 순교했습니다.
도마의 사역은 전반기 20년은 에데사 탁실라, 한국의 가야에
후반기 20년은 인도의 호칭, 챙나이에서 활동했습니다.(도마의 인도 선교는 수리아의 교부 에브라임과 다른 전승들에, 그리고 바돌로매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히브리 마태복음을 남겼다고 유세비우스 교회사 5권 10장에 나와있습니다.)

도마는 땅 끝이 인도인 줄 알고 왔었습니다
이 당시 인도 역시 로마의 동쪽 끝 속국이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인도까지 왔었는데 
막상 인도에 와서 보니 인도와 교역하는 더 땅 끝인 한국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가야와 인도는 많은 교역을 했답니다. 그 역사적 정황은 차차 설명)

2) AD 42~47년까지 한국에 6년간 머무르며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고 인도로 돌아갔습니다.(삼국유사 기록된 연대)
http://i.imgur.com/Ritj5OZ.jpg
3) AD 48년에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했습니다.
도마는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러 가던 길에 
인도에 들러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시켜주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4) AD 50년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했습니다.(서양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5) AD 52년 인도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였습니다.(인도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6) AD 72년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2.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은 인도사람.
1)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습니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에 있는 겐지스강 아이오디아라는 조그마한 읍입니다. 
그 옆에 페자바드란 큰 도시가 있습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는 약초, 향신료 등을 수출하는 아유로베다 무역상을 했던 소왕국의 왕이었습니다.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은 48년에 한국(가야)로 시집 왔습니다.
가락국기에 허황옥이 시집오면서 들고온 물품들을 보면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됐던 물품들이었습니다.
이런 물품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도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당시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교두보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 현금이 발견됐습니다.
http://i.imgur.com/OozlYGr.png
중국 왕망은 신나라를 만들고 3차례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AD 23년 왕망 죽음).
대천오십(AD 7~14년), 화천/화포(14~40년), 특히 화천은 20년만 통용됐습니다. 
아래는 그 화천이 발굴된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사도행전의 사역을 감당할 당시
이미 중국은 김해와 무역했고, 김해는 당시 최고의 해상무역 관문이며 철을 수출했지요(KBS역사스페셜)
http://i.imgur.com/ARJu6nz.png
1세기 당시는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가 왕성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헬라의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통일했고, 페르시아 아하수에로왕 역시 그랬죠.
BC 1000년 전 이미 솔로몬 때도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어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니 바닷길도 엄연히 잘 발달돼 있음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경주에서 매년 열리는 [실크로드 축제] 팜플렛.
http://i.imgur.com/wsA53g0.jpg
[로만글라스 2000년전에 신라에 오다] -KBS역사스페셜-
http://i.imgur.com/2GcxuCE.jpg
천마총 맞은 편에 있는 두 개의 고분(황남대총)에서 나온 것으로, 일본작가 요시미즈의 '로마문화 왕국 신라'에는 신라는 온통 로마문화라고 주장합니다. 그것도 단순히 물건을 들여온 정도가 아니라 사신이 왕래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2) 허황옥의 후손들
허황옥이 10왕자 2공주를 낳습니다. 그 후손이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입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로 부터 내려오는 왕손이 지금도 인도에 살고 있습니다.
http://i.imgur.com/MbLkcWN.jpg
3김중 한 분인 김종필씨가 아유타의 후손을 찾아 김해에 데려와서 허황옥릉에 참배도 하고
기념식수도 해놓았으며 이런 인연으로 페자바드시와 김해시는 자매결연까지 맺었습니다.
*실지로 한국어 속에는 인도어(드리비다어)가 400여개나 있습니다. 
특히 농사 관련 유사 단어 (쌀-Sal, 벼-Bya, 가래-Kalai, 메뚜기-Metti, 풀-Pul 등)
http://i.imgur.com/gkm5LAh.jpg
3) 가락국기에서 밝히는 아유타국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 가야에 관해 가락국기에 보면 허황옥은 아유타에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요디아란 말 자체가 인도 의학, 아유로베다 의학을 하는 사람의 옛 왕국이다보니 아유타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인도에서 아유로베다란 의학이 의료관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아유타국이 태국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허황옥이 가야에 태국 불교를 들고왔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유타국은 전세계에 두 곳이 있습니다. 
 (1) 태국의 아유타국은 AD15세기에 있었던 나라이지만, 
 (2) 인도의 아요디아는 BC 6세기부터 있었습니다. 
 -김병모박사(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 문학박사)

4) 서울대학교 서정선교수의 DNA검사
김해 대성동 고분박물관에는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후손들의 유물이 있습니다. 
거기서 발견된 뼈의 DNA검사 결과 허황옥은 인도의 타미린과 같은 염색체로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허황옥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등 많은 설이 잠잠해졌습니다.

3. 김수로왕은 누구인가?
1)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교과서에는 이전까지는 알에서 나온 신화적 인물로 소개했지만 현재는 기마민족 정도로 본다고 실려있습니다.
http://i.imgur.com/S1GlymX.jpg
2) 흑해의 스키타이민족
김수로왕은 흑해 옆에 있는 스키타이 출신 왕자입니다. 
스키타이민족은 문자가 없으면서, 금은세공이 굉장히 발달한 민족입니다.
신라의 금관, 귀고리 등에 보이는 점이 찍히는 '무금세공법'은 스키타이민족만 가능한 것으로 나중에는 신라에 전래됩니다.
*참고로 농경문화는 옥을 숭상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보물은 대개가 옥입니다. 실크로드를 타고 맨먼저
중국으로 들어온 보물도 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금을 숭상합니다. 가야가 멸망하고 신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신라는 백제,고구려,일본,중국에서도 없는 금문화입니다.
http://pluskorea.net/imgdata/pluskorea_net/200803/200803295443842.jpg
또 스키타이족은 황금장식과 함께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 목곽분이라는 무덤양식이 특징입니다(신라와 같음)
스키타이족은 흉노족 또는 훈족으로 불리는 북방 유목민족입니다. 
(수,당시대=돌궐(투르크=위구르=터키), 그리스시대=스키타이, 로마시대=훈족 등으로 불립니다.)
흉노(스카티아)가 인종학적으로는 아시아족에 속하는 황인종 퉁구스계열에 속합니다.

신라 문무왕 비문에도 김알지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KBS역사스페셜).
AD682 문무왕 사후 세워진 비석이 경주 선덕여왕릉 앞 사천왕사 터에서 발견됐습니다. 정조20년(1796년)에 조각발견, 1961년에는 비석 상단이 발견됐습니다.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문무왕 비문에는 신라의 조상이 흉노족이라고 밝힙니다. 김일제는 한무제시절에 흉노족을 토벌하다가 잡은 흉노왕 휴도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말을 사육하는 노예로 잡혔다가 나중엔 한무제의 경호실장까지 됩니다. 고향이 알타이(금)지방에서 왔다고 해서 김씨 성을 붙여줍니다(하략).
http://i.imgur.com/W518iHy.png
 중국문헌의 근거는 고대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왕 손권이 고구려를 ‘흉노의 왕’이라는 ‘흉노의 선우’라고 지칭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http://i.imgur.com/0vUNEfM.jpg
유럽인들이 경주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입니다. 신라 원성왕릉(괘릉)
http://i.imgur.com/8gjr6hZ.jpg
왕릉입구. 왼쪽에 문인은 신라사람이고 오른쪽 무인은 흉노족 입니다.
http://i.imgur.com/PU3lgZH.jpg
경주 괘릉에 있는 무인석상입니다. 
신라 원성왕릉
(785~798,김경신) 앞에 있는 것으로 AD 700년 경 스키타이민족과의 교역을 잘 보여줍니다.
얼굴 모양이 중앙 아시아인 - 아시아에서 서진한 스키타이족(흉노)이 유럽인들과 피를 섞여 동진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김수로왕의 청동 솥
김수로왕의 유물 중에는 김수로왕이 들고 온 청동 솥이 있습니다. 
그 청동솥은 쇠꼬챙이로 꿰어서 고기도 삼고 차도 끓이는 유목민들의 것입니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에 김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고고학계는 
김수로왕이 스키타이 사람이라고 다시 굳히게 됐습니다.
http://i.imgur.com/G7iGQCU.png
이런 영향은 신라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신라 금관총에서도 기마인물형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http://i.imgur.com/FdmXbW7.jpg
http://i.imgur.com/nad6zbf.jpg
4) 김수로왕은 유태계 스키타이인
신약성경 골로새서 3:11에 나오는 '스구디아인'이 바로 스키타이인입니다.
스구디아인은 흑해 야만족인데 유대인들이 그리로 와서 유대인 스쿠디아인이 됩니다.
이들은 철기 문명을 가쳤습니다.
http://i.imgur.com/6u6z1UE.jpg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보급했죠. 김해박물관에 철기 유물이 굉장히 많이 전시 돼 있습니다.
http://i.imgur.com/8xssXmE.jpg
김해시는 해마다 이렇게 철기문화의 가야를 알리는 행사를 엽니다.
청동기로 살던 한반도에 철기문명을 보급한 것은 김수로왕입니다.
1세기 당시 아시아의 반대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철연장을 사용했고, 로마에 끌려가 콜로세움을 짓습니다. 
이렇게 스키타이족은 철기를 사용하는 강력한 기마민족입니다. 이들이 북쪽으로 거쳐 중국까지 옵니다. 
http://i.imgur.com/KVUvCpD.jpg
당시 실크로드는 육상과 해상이 이렇게 거미줄 처럼 연결돼 있었습니다.
정학봉교수에 의하면 거기서 성을 쌓고 정착 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남하하게 되었고 고구려, 신라, 백제 등에도 많이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김수로왕은 삼국의 틈새 땅인 오늘날의 김해지역으로 와서 가야를 세운 것입니다
김수로왕은 스키타이에서 이주해 중국의 소김천씨라는 마을을 거쳐왔기 때문에 씨 성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김해의 구지봉에 왔을 때에 얼굴도 다르고 말도 못하니 
가마 안에서 통역을 통해 얘기를 나누었고, 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김해 박물관에 가면 스키타이인이 왔다는 유적이 있습니다.
김해지역과 경주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동복, 각배(ship), 황금장식 등 북방유목민들의 유골과 유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혼혈로서 스키타이계 유대인이라 추정해봅니다.
사도들의 사역 방법은 어디를 가든지 흩어진(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사도 도마가 인도에 왔을 때 찾아간 아유타족 역시 유대인 혈족입니다.(당시 사도들의 전도전략상).
그런 연유로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을 때 김수로왕이 유대계 디아스포라였던 관계로 만난듯 합니다.

사실 BC 1000년 솔로몬 시대때부터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무역했습니다(왕상9:26,10:22).
그곳이 에시온게벨이란 항구입니다. 물론 지중해를 통해 유럽지역과도 교역을 했지만 에시온게벨은
그 위치상 교역 대상국이 다릅니다. 이곳이 실질적인 해양실크로드
 출발점입니다
http://i.imgur.com/rFpgBKv.png
기원후 얼마까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상업을 한 민족은 유대인 밖에 없었습니다.
유럽인들끼리의 해양무역 말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말입니다. 
심지어 불교 신문에서도 불경을 나른 사람은 100% 유대인이라고 한답니다.
정학봉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6일을 그렇게 이동하다가 7일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려야하므로 
크고 작게 모여서 집성촌을 이루고 회당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4. 허황옥은 어떤 사람?
1) 사도 도마가 에데사를 거쳐서 탁실라(터키 이슬라바마드 옆)에서 왕궁을 짓고
인도 아유타국을 거쳐올 때에 허황옥의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참고로 도마는 왕궁건축기술자였습니다. 인도의 군다포러스왕의 왕궁터와 동전이 발견되고,
또 군다포러스 왕이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도마의 인도선교와 도마행전에 기록된 왕국건축가라는 사실은 학자들도 동의합니다.

인도에 간 도마는 한국에도 왔습니다. 한국에 와서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고, 부활절에 가야국을 기독교국으로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보고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인도에 들립니다(추정).
http://i.imgur.com/asz4wsx.jpg

2) 인도로 간 도마는 허황옥의 아버지에게 가야에 김수로왕이 모든 혼처를 마다하고 허황옥을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주게 됩니다. 허황옥의 나이가 16세 때 김수로왕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합니다(가락국기). 
가락 국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허황옥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시에 꿈을 주었다고 합니다.
허황옥이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죽으면 죽으리란 심정으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베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짝을 삼게
   하라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니라...
"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 -일연스님-)
(*상제란 말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성경에도 하나님을 '상제'로 번역했습니다.
'엘 샤다이'를 중국 광동어로 번역할 때 '상제(샹다이)'로 번역함.)
사도 도마는 이렇게 중매선 후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여 선교보고 하려고 떠납니다.
http://i.imgur.com/4nYHpvJ.jpg

3) 허황옥이 시집 오면서 타고 왔던 배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싣고 왔던 돌이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공주가 오는 날짜에 맞춰 크게 환영행사를 열었고, 
공주를 태워온 20여명의 뱃사공들에게 
큰 선물을 주어 보냅니다. 8월 1일 돌아가는 배에 벼 150석을 실어주었습니다.
선물들을 다 실으려고 배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싣고 왔던 돌들은 강변에 내려두고 가게됩니다.
그 돌을 탑으로 쌓아놓았습니다. 물론 이 돌들은 인도 산으로 판명됐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대로 구지봉을 비롯하여 파사석탑이 있는 일대가 모두 바다였습니다.
김해박물관에 전시된 조개무덤 패총은 지금의 김해가 옛날에는 전부 바다였다는 증거입니다.
김해평야가 만들어진 것은 3세기입니다. 가야의 철기 문화로 산에 나무를 베고 개간이 가능졌기 때문입니다.

http://i.imgur.com/6W2yHO5.jpg
*물론 불교계에선 '허황후가 불교를 들고 들어왔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려 말(AD 1281년) 일연스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이 당시에는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제3권 [금관성 파사석탑] 
"그때 (김수로왕과 허왕후 시대) 해동에서는 아직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부처님 화상과 교리가 이르지 않았던 까닭으로 토박이 사람들이 신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本記)에는 절을 창건하는 기록이 없었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에 이르러 비로소 
그 땅에 절(왕후사)를 세웠고..."

일연에 의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된 시기는 가락국의 건국(AD 42년)보다 훨씬 이후입니다.

삼국유사는 불교가 우리나라 들어온 때를 고구려 372년, 백제418, 가야 452, 신라 527년 이라고 밝혔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67년입니다. 그 영향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때(372년), 백제는 384년에 전파되었습니다.

가야는 452년 (8대 질지왕 2년) 왕후사란 절을 세웠습니다. 

신라는 418 년(신라 눌지왕 2년)에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신라왕가에서

반대하여 3년간 숨어 지내다 끝내 허락받고 흥륜사를 지으며 불교를 전파하였으나 신라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후 신라는  527년 법흥왕 때 하급관리 이차돈이 순교하고 다음 해 528년 불교를 공인합니다.

이것은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올 때 상당한 저항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신라가 어떤 신앙을 가졌기에 감히 법흥왕이 불교를 믿고 싶었는데도 신하들 왜 일제히 반대를 했을까요?

단순히 미신을 섬겼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한반도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이미 기독교가 뿌리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승자의 불교가 패자인 기독교의 역사를 다 제거한 것입니다.


5. 경북 영주의 도마상
1) 경북 영주에는 도마의 상도 발견되었습니다.
http://i.imgur.com/78pxyWo.jpg
이것을 처음 발견한 분은 당시 서울관악고등학교 역사교사였습니다. 
순복음교회집사님이셨는데, 어느 날 기도 중에 경북 영주 이곳에 가보라는 음성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들과 함께 막상 가서 보니, 이끼와 숲으로 뒤덮힌 바위덩어리였답니다. 
아무런 무속행위가 없었고, 넝쿨에 묻혀있었답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대나무와 붓을 가지고 하나하나 청소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다 상단부에서 히브리글자를 발견했습니다.
http://i.imgur.com/tPQpqft.jpg
[타우멤] = 바로 [도마]입니다.
히브리어 글자를 가장 먼저 학술화 한 분은 이장식 박사입니다.
이 분은 도마연구를 위해서 영국 멘체스터 대학에서 1년간, 미국 예일대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갔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아시아 고대기독교회사]란 책을 내고
도마상의 [타우멤]이 도마란 사실을 학계에 공식 보고하였습니다.

도마상의 왼쪽 밑을 보면 [지전행]이라는 한자가 씌여져있습니다. 
http://i.imgur.com/uaX6tqA.jpg

한자에는 여러 서체가 있습니다. 
갑골문이 있고, 전서, 해서, 초서, 예서체가 있는데 
이 서체는 예서체입니다. 예서체는 중국 한나라시대(BC 206년~AD 220년)에 사용한 것이라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석상임을 입증합니다. 또한 가야 건국이 바로 중국 한나라시대입니다.

그리고 불상에는 발가락이 이렇게 묘사된 것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발가락이 선명히 묘사된 것은 바로 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http://i.imgur.com/DjRky4Y.png
http://i.imgur.com/forrFTB.jpg
기독교계의 이런 주장이 일자 불교계는 문화재청에 요청해[마애보살입상]이라는 팻말을 갖다 붙여 놨습니다.
불교계에서는 이 도마상을 옛부터 미륵불상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한 동네에 미륵불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도마상은 방치된(?) 미륵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넝쿨에 묻혀서 고스란히 잘 보존되었던 것입니다.

혹자는 도마가 왜 십계명에서 금한 형상을 만들었을까란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마도 도마가 쓴 '지전행'이란 글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지전행이란 '땅 끝까지 다닌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행1:8 명령을 따라 주의 복음을 정말 땅 끝까지 전한 도마 사도의 고백일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도마는 40년간 주로 강과 바다쪽으로만 다니며 선교했습니다.
유브라데스, 인더스 강, ...남인도에도 가보면 사도 도마가 가장 오래 산 곳은 수로가 많은 케롤라지역입니다.
그 곳에는 사도 도마가 세운 7개의 교회가 지금도 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후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콜로세움 경기장을 지었습니다.
http://i.imgur.com/KHqW4FB.jpg
도마는 왕궁건축기술자였습니다. 에뎃사와 북인도에서 선교 하며 군다포러스 왕궁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다가 실크로드의 땅 끝인 한국의 낙동강 지역을 선교하게 되었습니다(가락국기에 기록된 연대 AD 42년).
AD 48년에 김수로왕과 허황옥을 중매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AD 50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합니다(서양역사 연대). 
AD 52년 인도의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다가(인도역사에 기록된 연대), 
AD 72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합니다.
이렇게 도마의 일생은 한국과 서양과 인도에 기록된 연사적 연대가 한 사람의 이력서처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도마상의 머리가 없습니다. 
정학봉교수의 책에 의하면 사람들이 머리를 인근 제변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그 얼굴이 한국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의 골격과 같다고 보고합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불상의 목이 훼손됐습니다. 경주 일대 불상들이 목이 없습니다)

2) 나뭇결 무늬 유리잔(황남대총남분, 신라)
http://cfs8.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EN3eDdAZnM4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zQuanBn&filename=34.jpg
대릉원 황남대분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스라엘제로 판명이 났습니다.
현재 김해박물관에는 수많은 성찬기를 볼 수 있고, 그 흔한 불상 하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3) 쌍어문 =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김수로왕능 입구 현판입니다. 당시 백제,신라,고구려에는 이런 국기 같은 마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가야에서만 사용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왕능 입구의 현판의 원래 모습은 왼쪽이데, 지금은 오른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원 그림은 김해박물관 옛날 홍보자료(브로슈어)에도 실려 있습니다. 
나무 목판이다보니 보수를 하면서 저렇게 원형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교회가 이런 주장을 하니 
불교에서 마치 석탑처럼 왜곡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왼쪽)는 떡과 물고기를 입으로 먹는 모습입니다.
http://i.imgur.com/eKACzhu.jpg
313년까지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가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313년 이후부터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이 쌍어문의 이 그림은 바로 오병이어를 먹는 모습입니다.
빨간 점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고, 입 모양에 떡과 물고기 두마리를 둔 것은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물고기의 등지느러미 형태는 이스라엘의 타부가(가버나움)에 있는 오병이어 물고기의 모양과 일치합니다.
http://blogimg.hani.co.kr/editor/uploads/2008/10/14/66135_72966.jpg_M500.jpg
이 쌍어문에 대한 연구는 김병모박사가 40년을 연구하여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는 어떤 쌍어신앙을 가진 무리들이 이스라엘에서부터 인도~ 한국~ 일본까지 갔다는 보고를 학계에 냈습니다.
김병모박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쌍어문의 흔적들은 저 루트를 지나는 나라들 마다 다양하게나타나 있답니다.
김수로왕비 허황옥(쌍어의 비밀 : 김병모, 조선일보사. 1994)참고

http://monthly.chosun.com/upload/0404/0404_334_9.jpg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쌍어신앙이 이 루트를 따라 1세기에 일본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박사는 그 기원을 BC 2700년 페르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갔는데 너무 나가셨지요.
다시피 페르시아의 다곤신(오안네스)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김병모박사가 주장한 '쌍어신앙'은 사실 오병이어, 즉 기독교의 표식입니다.
결국 바울이 로마를 찍고 스페인(서바나) 서쪽 끝으로~
가장 의심많다고 타박했던 도마가 동쪽 끝까지 복음들고 와 주었습니다

2천년 전의 역사를 무슨 수로 100% 고증시켜주길 바라겠습니까?!!
몇몇 납득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유교,이슬람교는 발생한지 100년~600년 만에 한반도에 들어왔는데, 유독 기독교만 1800년이 지나서 들어왔다는 것도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소리입니다. 이슬람교는 8세기 말 통일신라의 국제무역항 울산에 등장합니다.(고려 속요 쌍화점에 이슬람의 존재가 나타나고, 세종대왕은 무슬림에게 조선 복장을 입으라고 명했다고 세종실록 9년 4월 4일에 실려있습니다.-최상한박사-)
"행1:8 땅끝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못 이루나 하나님은 이루실수 있습니다. 
또 신약성경 정경화 되기 전이니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땐 내용적으로도 많이 아쉽지만
여튼 그 믿음의 대를 잇지 못하고 고려 불교에 완전히 먹혀버렸습니다.

기껏 동짓날 팥죽이나 쑤어 뿌리고, 북어 두 마리 묶어서 액땜하는 미신 정도로 전락해버렸네요~


:
Posted by ijoseph
2018. 4. 6. 13:52

부활의 10가지 결과 기독교 일반2018. 4. 6. 13:52

부활의 10가지 결과

Devotional by John Piper
(원문 보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린도전서 15:17)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10 가지 놀라운 것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1) 결코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로마서 6:9).

2) 회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사도행전 5:30, 31).

3) 거듭남.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4) 죄의 용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린도전서 15:17).

5) 성령.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사도행전 2:32-33).

6) 택하신 자들에 대한 정죄 없음.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로마서 8:34).

7) 예수님의 개인적인 교제와 보호.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8) 장차 올 심판의 증거.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도행전 17:31).

9) 하나님의 장래의 노하심에서의 구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우리가 기다리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10; 로마서 5:10).

10) 우리 자신의 부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린도후서 4:14; 로마서 6:4; 8:11; 고린도전서 6: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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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
2018. 4. 6. 13:50

부활의 복음 좋은 글2018. 4. 6. 13:50

부활의 복음

김장환 QT365

(원문보기)

영국의 유명한 변호사인 프랭크 모리슨은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특히나 성경에서 가장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은 부활에 관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자료를 낱낱이 분석해 부활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책을 쓰려 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진 책을 쓰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부활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문건과 책, 전문가의 견해와 여러 신학교의 논문들을 연구한 결과 그는 부활을 오히려 믿게 되었으며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모리슨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고 성경을 부인하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연구한 자료를 다시 엮어서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나?’라는 책을 썼고, 처음의 의도와는 반대로 부활의 확실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부활은 복음을 한 번에 믿게 만들 만한 힘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부활만큼 허망한 소리도 없지만 성도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만한 힘이 바로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날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믿음을 가슴 속에 품고 살게 하소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의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
Posted by ijoseph
2018. 4. 6. 12:55

막힌 담을 헐어라 좋은 글2018. 4. 6. 12:55

갈릴리마을 홈페이지

막힌 담을 헐어라

최용덕(해와달 발행인)

(원본 보기)


봉사자로서 어부동 어떤 집 수리를 직접 하고 있습니다. 시멘트벽 두 군데를 뚫어 출입문을 내야 하는데 그 벽이 어찌나 단단한지 사흘 꼬박 죽어라 매달려 겨우 성공했습니다. 막혔던 세 공간이 마침내 하나로 연결됐습니다. 그런데 강력 시멘트벽을 뚫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 상한 인간관계 사이에 막혀있는 벽을 뚫어 서로 소통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 아버지 형제 간, 어머님네 교회에도 가슴 아픈 소통불가의 견고한 벽이 있지만, 내게도 오랜 세월 외면하고 있는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성서 고린도후서 5:18 말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직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화해자 사명도 감당해야 하지만,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화해자의 사명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시멘트벽을 뚫으려 애쓰는 내내 너는 왜 네 인간관계에서 단단히 막혀 있는 벽들을 뚫으려고 최선을 다하지는 않느냐?”고 주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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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
2018. 4. 6. 12:49

고난주간이란? 기독교 일반2018. 4. 6. 12:49

고난주간이란?


고난주간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는 한 주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 주일로부터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부활 주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수난의 노고와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가 바로 고난 주간이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고난 주간에는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그야말로 예수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요, 전 우주적 사건이기도 했던 대사건들이 숨막히게 전개 되었다. 이에 성도들은 주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응축적으로 담겨 있는 이 주간의 각 요일마다 그 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각각 기억하여 한 주간을 내내 엄숙한 절기로 보내게 된다.

'고난 주간'(Passion week) 또는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등으로 불리는 고난 주간의 원래 명칭은 큰 주간, 즉 하나의 큰 일주일이라는 뜻의 '대주간'(Great week)이었다. 이 명칭은 동로마 교회의 고난 주간 행사를 기록한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 속에 언급되어 있으며, 서로마 교회에서도 이 주일을 대주간이라고 불렀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주간의 공식 명칭으로, 대주간을 의미하는 'Hebdomada Magna)' 또는 'Hebdomada Major' 등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 의로운 인간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다.

태초에 인간은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했다. 그리하여 원래의 규정대로 죽어 영벌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세운 법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Love)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원칙대로 처벌하시면서도 구원받을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대속 희생으로서의 고난을 겪으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런 구속의 법을 가장 처절한 사형수단이었던 십자가(the Cross)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영육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본래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주권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수난을 당하신 주님의 사역에 담긴 공의와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창 3:15; 사 53:1-12)

고난주간의 유래

고난 주간은 사순절 절기 내에 포함된 절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이러한 고난 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롬 6:3-5, 고전 11:23-26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 주간이 전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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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