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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1-9)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 


성경 속에 있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이 부르신 사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부르심의 사건, 만남의 사건은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도, 시골 촌뜨기 목동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건, 만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었던 기초도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 곧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거부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만남 속에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울처럼 크게 쓰임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사람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달란트만큼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가 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을 때에만 언제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 수 있고, 그 사건이 있을 때에만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 1절~9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울의 출생과 배경, 그리고 그의 열심 

'큰 자'라는 이름의 뜻을 지닌 사울은 당시 로마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던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한 자였습니다. 미국의 시민권자는 세계 어디를 가도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 받은 일들이 예전에 있었던 것처럼 로마의 시민권이란 그처럼 강력한 권한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자는 로마의 법 이외에는 어떠한 법령으로도 처벌을 내릴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런 권한을 부여 받았을 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로서 명망 높은 혈족의 후손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율법에 능통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바리새파 사람이요, 모든 히브리 민족들이 그러하듯 하나님께 대해 특출한 열심을 갖고 있던 자였습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3:4-6)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행22:3)
 

그야말로 남부러울 게 없던 사울이요, 온갖 출세가 보장된 사울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 자신의 열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때에도 산헤드린 의원들 너머로 지켜보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도 멀찍이서 목격한 장본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그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예수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기독교인들을 남녀를 막론하고 박해하고 잔멸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의 눈엔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자들이 자신이 믿는 유대교를 혼란케 하는 이단아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스데반이 신성모독죄의 덫에 걸려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는 증인으로서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활약상에 힘입어 예루살렘 시내에 들풀처럼 번져 나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내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색출 작전이 점차 성공을 거두어 들였다고 판단한 사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넘어 저 멀리 다메섹까지 겨냥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서 130마일에 달하는 거리였지만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의 색출 포박 작전은 점점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듯 최고층에 속한 신분과 앞으로의 출세까지 보장된 사울에게는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부러워할 게 있다면 대제사장의 반열에 오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인생의 목표가 눈에 보이는 성공과 명예뿐이었으니, 산헤드린 의원들이나 대제사장에게 더욱더 잘 보이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는지, 사도행전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찾아온 주님의 모습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 9:1-2) 

사울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의 색출 진압 작전을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예전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포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서, 무려 6일씩이나 걸리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여러 명의 군사들과 함께 다메섹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른바 그들의 출발은 마치 적을 소탕하기 위한 군인들의 출정식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6일 중 3일이 지났는지, 4일이 지났는지 알 길이 없지만 다메섹으로 향하던 어느 날 그에게 빛이 둘러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은, 그가 뒤늦게 고백한 사도행전 26장 13절에 의하면, 중동의 정오 태양빛보다 더 강렬하고 눈부신 빛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빛은 자연계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라 진리 되시는 하나님의 빛, 생명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빛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9:3-4) 

하늘로부터 갑자기 내리비치는 그 빛에 의해 그는 땅바닥에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생명과 진리의 빛 앞에 감히 맞설 수 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육체의 성공과 명예만을 목적으로 하는 죄악 된 삶을 살고 있던 사울로서는 감히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비친 온통 하얀 빛깔 앞에 시커먼 자신의 실체를 가릴 수 없었던 사울은 그만 거꾸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의 온 귀에 우렁찬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4) 

사울은 그때까지도 직접적으로 나서서 예수님을 박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를 핍박할 때 멀찍이서 협조자로 나설 뿐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도 그가 전면에 나섰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세주가 어떻게 숨을 거두는지는 멀찍이서 지켜봤을 것입니다. 

그가 직접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 것은 스데반에게 신성모독죄를 들먹여 돌로 쳐 죽일 때 증인으로 나섰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포박하는 그 시점부터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박해자가 아니라 단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박해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모습을 예수그리스도 자신에게 한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일의 책임은 그 일을 주관하는 총책임자에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일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행한 일이듯,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자들의 행위도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 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감옥에 잡아넣으려 했던 것 역시 들풀처럼 번져 나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는 직접적인 박해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곧장 사울에게 다메섹 시내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누군가 네게 이를 것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사울은 그때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한 채 동료들의 도움에 힘입어 다메섹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의 죄성을 일깨운 주님의 빛과 음성 

이상과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줍니까? 사울이 주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아니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이른바 주님의 현현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울은 훗날 사도 바울이 되어 온 세계를 누비며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지 않습니까? 

그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가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이 말씀 속에서 전해 주고 있는 주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찾아와 주시고, 그를 만나 주지 않았던들 그 인생은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과 만나는 사건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이 왜 사울에게 중요한 사건일까요? 그 만남을 통해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 이 세상의 것들은 온통 상대적인 것들이요 오직 절대적인 것은 하늘에 속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 첫 번째 만남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은 어둠과 거짓을 밝히는 기능을 합니다. 빛은 생명을 키우는 역할을 합니다. 사울에게 찾아 온 주님의 빛은 이 세상의 상대적인 빛들이 다 거짓임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이전에 자신이 육체적으로 자랑해 온 율법의 빛이라는 것도,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추구하고 대제사장이 주장해 왔던 정의라는 것도, 실은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진리와 생명의 빛에 비하면 모두 더럽게 오염된 것들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 빛은 사울 안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더러움과 거짓된 죄악의 실체를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통해서만 자신의 영혼이 살 수 있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빛의 인도를 받아야만 참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 두 번째 만남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부르시면서 주님은 부활하신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또 병든 자들을 고치시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에게 쫓겨 다니고, 또 십자가에 처형되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분이 지금 부활하시어 너무도 당당하게,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엄으로 자신 앞에 나타나 부르고 있었으니 어찌 떨지 않을 사울이었겠습니까? 여태껏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핍박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던 그였으니, 부활하신 주님의 부르심 앞에 어찌 고개를 내밀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울을 향한 주님의 음성은 단순히 그의 박해를 책망만 하는 음성은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박해가 헛된 일임을 자각케 하는 사랑의 음성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없지만 다른 사본에는 5절 하반절이 있습니다. 

"그 박해가 소처럼 길길이 들이받고 날뛴다 해도 나는 끄덕도 없느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울의 박해가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음성입니다. 설령 주님께서 그 음성을 들려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울은 이미 주님께서 자신의 박해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빛으로 찾아오시고, 직접적으로 음성까지 들려주신 이유가 바로 자신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에 기인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임한 주님의 현현 

그런데 위와 같이 주님께서 찾아오신 사건이 비단 사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그리고 모세에게도 있었던 사건입니다. 75세가 되기까지 실패자 인생을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때까지 하나님을 박해하거나 하나님의 대적자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부르신 사건 자체가 아브라함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전에 자기 인생을 자기 능력과 힘대로 살아 보려 한 게 얼마나 교만한 삶이었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 삶 속은 하나님을 찾을 길조차 없었던 죄 된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 부르셨다는 것은, 이제는 그의 힘과 능력을 내려놓으라는 회개의 촉구요, 이후부터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라는 새로운 방향 전환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사는 길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부르심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는 또 어떻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까? 40살까지 애굽의 궁궐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자기 정의의 잣대로 애굽 병사를 쳐 죽인 채 땅에 파묻은 게 탄로가 났을 때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고, 그때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르기까지 지팡이 하나밖에 없는 빈털터리 신세로 살지 않습니까? 그런 어느 날 홀연히 호렙산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 불꽃의 모습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곧장 "모세야, 모세야" 하시며 당신의 음성으로 모세를 두 번씩이나 부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곧장 신발을 벗도록 명령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신발을 벗도록 했습니까?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에, 그의 죄인 됨의 상징인 신발을 벗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왜 그를 불렀는지, 모든 이유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모세가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기에, 그가 품고 있던 자기 정의의 기준들을 모두 벗도록 해 주셨기에,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는 자라야 흔들리지 않아 

이상과 같은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주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본문 속 바울과 같은, 똑같은 찾아오심이나 부르심이 아니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온 일들이 모두 헛된 교만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런 자각의 사건이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을 때 그때까지 품고 있던 자기 의의 기준들이 다 부질없는 것들이기에 버려야 할 것들임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런 자각의 사건이면 충분합니다. 본문 속 바울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찾아오셨을 때 그 자신이 온통 암흑 덩어리 죄인임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런 자각의 사건이면 족합니다. 

우리 자신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크게 쓰임 받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각자의 달란트가 있지 않습니까? 그 달란트 내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자각하는 사건입니다. 이른바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내가 자각하는 사건이요, 그분의 빛만이 나의 어둠과 죄악을 몰아낼 수 있다는 자각의 사건입니다. 

그것이 없이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칫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울의 열심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동족을 괴롭게 한다는 이유로 때려죽인 모세의 열정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열심과 선행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나온 일들이 아니기에 헛된 자산 사업에 그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늘 통로를 잇는 일이 되기 위해선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의 사건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이 위협해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신의 죄인 된 실체를 자각하고, 내 능력이나 힘으로 해 왔던 일들이 모두 교만한 일이었음을 자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내 의의 기준도 상대적인 의였음을 자각한 그 시점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일들이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겪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그냥 방치하지 않고 이끌어 올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 이후에 곧장 쓰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러서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배고픔과 추위와 배가 파선당하는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도 그리고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이었지만 그때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숱한 좌절과 넘어짐의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도 나이 80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통해 그 즉시 전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닙니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너 광야 40년 삶을 살기까지 숱한 좌절과 괴로움의 시간들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던 것은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각자의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들 속에 좌절과 괴로움과 어려움의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넘어지거나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 있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추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자각한 사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능력과 지혜를 믿고 살아왔던 교만한 인간임이었음을 자각한 사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 정의와 의로움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다고 착각해 온 나의 오만함을 자각한 사건이 있습니까? 

그때 내게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사울에게 나타난 빛의 모습이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까? 모세에게 나타난 불꽃의 형상이었습니까? 그런 모습, 그런 형상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어떠한 모습이나 형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나의 죄인 됨을, 나의 교만함을, 나의 오만함을 내어놓고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본질이 용서 받을 수 있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있고, 그때부터 내가 행하는 일의 초점을 하나님의 뜻에 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 이후에도 내게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계획하는 일들이 뒤틀리고 무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근본적으로 망하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당신의 자녀들이 고생하며 근심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예레미야애가3:33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리라." (고후4:7-9) 

우리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없다면 이 시간 이후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내게 찾아오시도록, 그리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나의 죄인 됨을, 나의 교만함을, 나의 오만함을 토하는 사건이 있었다면, 이제부터 행하는 일들 속에서 만나는 어려움과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자녀 됨을 확증해 준 그 사건이 있는 한,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하거나 답답한 일을 겪는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섭섭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한 단계 승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리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참된 본심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들 각자에게 음성으로, 불꽃으로,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습니까? 
그들처럼 크고 위대하게 쓰임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내게 있는 달란트만큼만 쓰임 받아도 족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 있었는지, 
예수그리스도 앞에 죄인 된 모습을 들여다본 사건이 있었는지 점검하길 원합니다. 
진정으로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나의 죄인 됨을, 
나의 교만함을, 
나의 오만함의 실체를 비추어 준 사건이 있었습니까? 
없다면 그 만남의 사건을 갖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아 
우리에게 닥쳐 있는 고난과 어려움들도 기꺼이 이겨 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삶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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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joseph